연쇄 살인마도 꼼짝없이 걸려드는 ‘최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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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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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려 감춰졌던 기억도 법 최면이 손을 내밀면 조금씩 고개를 든다. 머리에 뇌파 측정기를 쓴 신진우 기자(왼쪽)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최면 반응성 검사’를 받고 있다. 함근수 범죄분석실장의 지시에 따라 손에 무거운 사전을 들었다고 상상하는 ‘손 떠오르기’ 최면에 들어간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억눌려 감춰졌던 기억도 법 최면이 손을 내밀면 조금씩 고개를 든다. 머리에 뇌파 측정기를 쓴 신진우 기자(왼쪽)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최면 반응성 검사’를 받고 있다. 함근수 범죄분석실장의 지시에 따라 손에 무거운 사전을 들었다고 상상하는 ‘손 떠오르기’ 최면에 들어간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008년 7월 전북 전주의 한 가정집. 강도가 택배 배달원으로 가장하고 들어와 집에 있던 두 아이를 위협했다. 아이들을 장롱에 가둔 강도는 물건을 훔친 뒤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현장을 무사히 탈출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공포와 충격으로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근에 다른 목격자가 있었다. 초등학교 옆에서 엿을 팔던 김모 씨(32·여)가 범행 직전 길 건너편에 서 있던 범인을 봤다. 하지만 김 씨 역시 범인의 인상착의를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진술을 받았지만 추적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도입된 방법이 바로 법 최면. 법 최면 전문가인 박주호 수사관(전북지방경찰청)이 사건을 맡았다.

○ 얼굴, 대화 내용, 오토바이 모양까지


최면에 앞서 박 수사관은 김 씨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거리감을 없앴다. 또 과거 우울증을 앓았던 김 씨의 부정적인 기억을 심리치료를 통해 지웠다. 그리고 마침내 최면을 시작했다.

최면에 들어간 지 20분쯤 지났을까. 김 씨에게서 반응이 왔다. “고등학생이에요. 노란 티를 입고, 무늬가 있어요, 까만 무늬. 연한 색 청바지를 입었어요. 키는 175∼177cm. 많이 말랐어요. 머리는 갈색이고 뒷머리가 귀를 덮었어요. 얼굴은 갸름하고 눈이 커요.” 김 씨는 범인의 인상착의는 물론이고 공범인 친구와의 대화 내용, 친구가 타고 온 오토바이의 모양까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이 진술을 바탕으로 몽타주가 그려졌다. 그리고 5일 뒤 범인이 검거됐다. 얼굴은 몽타주와 유사했고, 당시 입었던 옷가지는 물론이고 오토바이 등 다른 증거물도 김 씨가 진술한 내용과 대부분 일치했다.

사실 최면이란 말 자체는 그리 낯설지 않다. 흥미나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무대최면’은 꽤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신과, 산부인과 등 병원에선 치료를 목적으로 최면을 이용해 왔다. 최근엔 비만 치료, 금연 등을 위해서도 최면이 쓰이고 있다.

법 최면 역시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돼 고도로 의식이 집중된 최면 상태를 이용한다. 다만 법 최면은 사건의 피해자나 범행을 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이들이 당시 상황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 잠재의식 속에 감춰진 기억을 끌어내 수사 단서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선 1970년대부터 이미 법 최면을 범죄 수사에 이용해 왔다. 현재 미국에는 법 최면 훈련을 받고 전문 수사관으로 활동하는 인력만 1000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선 1999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법 최면 전담 부서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됐다. 현재는 각 지방경찰청에서도 법 최면 수사관을 양성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40명가량의 전문 수사관이 활동 중이다.

법 최면 전문가가 되려면 정신의학, 심리학 등 관련 교육을 받은 뒤 대한법최면수사학회의 자격증을 따야 한다. 물론 단순히 최면 기술만 안다고 전문가가 되는 건 아니다. 범죄 수사에도 전문성을 지녀야 필요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범죄 재연 프로그램을 본 1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24시간 뒤 범인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운데)의 얼굴을 떠올리게 해 몽타주를 그려봤다. 실험 직전 5명은 법 최면 과정을 거쳤고, 나머지 5명은 그렇지 않았다. 결과가 나온 뒤 수사관들이 배우와 가장 닮은 몽타주 3개(점선 속)와 가장 닮지 않은 몽타주 3개(굵은 실선 속)를 뽑았다. 그 결과 가장 닮은 몽타주 3개는 모두 법 최면을 받은 5명이 그린 것(1, 3, 4, 7, 9)에서 나왔다. 가장 닮지 않은 몽타주 중 2개는 최면을 받지 않은 사람이 그린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최면 과정을 거친 사람이 그린 것이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범죄 재연 프로그램을 본 1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24시간 뒤 범인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운데)의 얼굴을 떠올리게 해 몽타주를 그려봤다. 실험 직전 5명은 법 최면 과정을 거쳤고, 나머지 5명은 그렇지 않았다. 결과가 나온 뒤 수사관들이 배우와 가장 닮은 몽타주 3개(점선 속)와 가장 닮지 않은 몽타주 3개(굵은 실선 속)를 뽑았다. 그 결과 가장 닮은 몽타주 3개는 모두 법 최면을 받은 5명이 그린 것(1, 3, 4, 7, 9)에서 나왔다. 가장 닮지 않은 몽타주 중 2개는 최면을 받지 않은 사람이 그린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최면 과정을 거친 사람이 그린 것이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법 최면, 얼굴을 그리다

법 최면이 범죄 수사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는 역시 몽타주 작성이다.

국내 몽타주 수사의 대부(代父) 정창길 수사관(대전지방경찰청)은 “피해자, 목격자 등의 기억을 더듬어 그려진 몽타주는 특히 성폭행이나 강도 등 강력 사건 수사에서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건들은 주로 폐쇄회로(CC)TV가 없는 으슥한 장소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커 몽타주가 범인 추적의 유일한 열쇠다.

몽타주는 기억에 의존해 작성되다 보니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틀’과 경험 안에서만 현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부정확하고 엉뚱한 몽타주는 오히려 범인 검거를 더 어렵게 만든다.

법 최면은 이런 몽타주의 단점을 극복하게 해 준다. 보통 사건 당사자들은 당시 충격으로 인해 본 것도 보지 못했다고 착각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가지게 된다. 최면은 이들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마음을 열어 억압된 기억의 파편을 ‘최대한 객관적인’ 상태로 의식의 세계까지 끌어내 준다.

2008년 전북 익산에서 젊은 남성 2명에게 폭행당하고 차까지 빼앗긴 여성 A 씨. A 씨는 사건 당시 충격과 고통으로 범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법 최면 과정에서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몽타주가 그려졌고, 한 달 뒤 몽타주를 보고 제보한 시민에 의해 부녀자 연쇄 납치 일당이 검거됐다.

또 피해자의 상당수는 사건이 있은 지 며칠만 지나도 용의자 인상을 실제보다 더 험상궂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박주호 수사관은 “피해자들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왜곡하곤 한다”면서 “법 최면은 이렇게 뒤틀린 부분을 교정해 주는 도구”라고 설명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법 최면을 통해 그린 몽타주가 범인 검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례만도 매년 10건 이상”이라고 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2006년 1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정남규의 검거. 한 중국음식집 종업원이 범행 현장을 다시 찾은 정남규를 우연히 목격한 뒤 최면 과정에서 얼굴을 떠올렸는데 그렇게 작성한 몽타주가 2006년 잡힌 실제 정남규의 얼굴과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 법 최면 이용해 떠올리게 했더니

법 최면을 거쳐 작성한 몽타주가 그렇지 않은 몽타주에 비해 실제와 더 유사하다는 사실은 국과수가 2006년 한 실험에서 증명됐다.

국과수 범죄분석실은 실험에 동의한 대학생 10명에게 1분 19초 분량의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영상은 한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범죄 재연 프로그램의 일부. 참가자들은 동영상을 시청한 지 24시간 뒤 동영상에 나온 남성 배우의 몽타주를 작성했다.

국과수는 각각 5명으로 나눈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에 결정적인 차이를 줬다. 실험집단은 몽타주 작성 직전 법 최면을 통해 범인의 얼굴을 회상하는 과정을 거치게 한 반면 통제집단에는 특별한 법 최면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몽타주 전문 수사관은 누가 어떤 집단에 속해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그렸다.

이렇게 그려진 10개의 몽타주를 각 지역에서 모인 수사관들이 평가했다. 이들 역시 어떤 몽타주가 실험집단의 몽타주인지 모르는 상황. 이들은 동영상에 등장하는 범인의 얼굴을 확인한 뒤 몽타주 가운데 그 얼굴과 가장 일치하는 3개, 반대로 가장 일치하지 않는 3개를 뽑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가장 일치하는 3개(1, 7, 9) 모두 실험집단의 몽타주(1, 3, 4, 7, 9)에서 나왔다. 대신 가장 일치하지 않는 몽타주 3개(2, 4, 6) 가운데 2개가 통제집단(2, 5, 6, 8, 10)의 몽타주였다(위쪽 사진 참조).
▼ 몽타주, 최면 거쳐 만들면 실제 모습에 가까워져 ▼

이런 차이는 2007년 국과수가 실시한 보다 큰 규모의 실험을 통해 자세한 수치로도 파악됐다. 국과수 범죄분석실은 비디오 화면 같은 수동적인 상황이 아닌, 범죄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기억을 조사하기 위해 6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을 3명씩 나눠 국과수 업무 견학차 범죄분석실에 오게 했다. 이때 모의 범죄자가 들어와 5분 동안 참가자 곁에 앉은 국과수 직원에게 화를 낸 뒤 나갔다. 물론 모의 범죄자는 배우였고, 상황 역시 우연을 가장한 실험이었다.

참가자 모두에게 같은 실험을 하고 28시간 뒤 다시 이들을 불렀다. 60명 가운데 실험집단 30명에겐 법 최면을 하고, 나머지 통제집단 30명에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의 범죄자의 인상착의(신체적 특징, 모자, 상의 및 하의 등), 언어적 특징, 이동경로 등을 떠올리게 한 뒤 점수를 매겼다.

그 결과 인상착의(실험집단 17.65, 통제집단 15.4)는 물론이고 언어(실험 6.83, 통제 5.67), 이동경로(실험 4.3, 통제 4.1) 등 모든 항목에서 실험집단의 수치가 높게 나왔다.

이에 대해 함근수 국과수 범죄분석실장은 “항목별로 드러난 차이도 의미 있지만,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목격한 내용에 대해 확신하는 수준 역시 실험집단이 더 높았다는 점”이라며 “이것은 법 최면을 바탕으로 한 심리적 재구성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해 주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 뇌파 분석…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물론 법 최면을 통해 떠올린 기억 역시 완전하진 않다. 기억이 오염될 가능성도 있고, 최면이 오히려 기억에 대한 잘못된 확신감만 심어준다는 지적도 있다. 어떤 진술이 증거 능력을 가지려면 신빙성이 있고 과학적으로 입증돼야 하는데 이런 요건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법 최면 진술은 아직 법적인 증거 자료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뇌파 분석은 새롭게 떠오르는 법 최면 분야다. 함 실장은 “목격자의 기억을 구두 진술로만 파악한다면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법 최면 과정에서 알파파, 베타파, 세타파 등 각종 뇌파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분석하면 보다 객관적이고 시각적이면서 실시간 판단까지 가능한 기억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뇌파 분석은 일부 법 최면 과정에선 이미 사용되고 있다. 얼마 전 한 남성이 여성의 목을 조른 뒤 인근 주차장으로 끌고 가 강제 추행하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 여성 외엔 목격자도 없는 상황. 그 여성은 법 최면 과정에서 범인의 차량 번호를 진술했다. 번호는 2843. 하지만 수배 결과 의심되는 차량이 없었다. 결국 최면 중 뇌파 검사를 했더니 2, 8, 3 외에 4가 아닌 5에 뇌파 반응이 온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이 조합을 바탕으로 추적한 끝에 결국 범인을 검거했다. 차량 번호는 2583이었다.

하지만 뇌파 분석 역시 갈 길이 멀다. 각종 반응에 따라 형성된 뇌파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아직 구축되지 않아서다.

그렇다면 법 최면에 의한 진술은 당장 법적 증거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뇌파 분석은 정보가 불충분하다는 측면에서 법 최면의 쓰임새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현실은 그 반대다. 전문 인력 충원, 매뉴얼 구축 등 과제가 많지만 법 최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 법 최면 전문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범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지능화되면서 범죄 현장에 남아있는, 범인을 추적할 수 있는 물리적인 단서가 줄어들고 있어요. 법 최면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가장 인간적인 과학 수사 방법입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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