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보유하고 있는 헬륨네온 레이저. 한국에서는 1983년부터 진공 상태에서의 헬륨네온 레이저 파장을 이용해 1미터 표준원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제공
컴퓨터나 게임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운동장이 좋은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땅따먹기, 자치기, 비석치기 등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이때는 땅바닥에 줄을 긋기 위해 한 걸음, 두 걸음 걷거나 왼발과 오른발을 연달아 디뎌가며 거리를 쟀다. 나는 요즘에도 무엇인가를 재야 할 때 마땅한 측정도구가 없으면 무심코 손가락이나 팔을 벌린다. 이처럼 신체의 일부를 이용해 길이를 재는 것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활용해온 방법이다.
○ 신체를 활용한 길이 측정
기원전 2500년 무렵 만들어진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웬만한 산만큼 거대하지만 놀랍도록 정교하게 지어져 세계적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흥미롭게도 그때 사용된 길이의 기준은 통치자인 파라오의 신체였다. 이집트인은 파라오의 팔꿈치부터 가운뎃손가락까지의 길이에다 손바닥 폭의 길이를 더해 ‘로열 이집트 큐빗’이란 단위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단위를 기준으로 자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피라미드를 정확하게 건축할 수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현재도 사용하는 ‘피트’(1피트는 30.48cm)는 사람의 발 길이에서 유래했고, ‘인치’(1인치는 2.54cm)는 보통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폭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단위를 만들어 사용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러 개의 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어느 자가 더 정확한지 알기 위해선 결국 파라오 등 기준이 되는 사람의 팔이나 발 길이와 비교해봐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파라오는 이미 죽었고, 설령 살아있더라도 신체 길이는 수시로 바뀌므로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한편 우리나라 세종 때 기틀이 완성된 조선의 도량형은 독특하게도 사람의 신체가 아닌 음악에서 유래됐다. ‘악학궤범’의 저자 박연은 12음률 중 하나인 황종음(黃鐘音)을 정하기 위한 황종률관(黃鐘律管)의 길이를 표준화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는 기장(곡식) 중 크기가 중간치인 것을 골라 100알을 나란히 쌓은 길이를 황종척(黃鐘尺) 1척(약 34.72cm로 추정)으로 했다. 이 황종척은 조선 도량형의 ‘원기(原器)’가 됐다.
○ 1미터의 탄생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준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자를 만들려는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돼 왔다. 마침내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개혁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됐다.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의 북극점에서 적도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1미터’로 하기로 했다. 미터(meter)는 ‘측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metron’에서 따온 말이다. 측량사들은 실제로 자오선(子午線)을 따라서 그 거리를 재었고, 그렇게 결정된 길이로부터 ‘미터원기’를 만들었다. 미터원기는 성질이 잘 변하지 않는 백금(90%)과 이리듐(10%)의 합금이다. 이와 동일한 크기의 미터원기가 여러 나라에 보급됐고, 각 나라는 이를 기준으로 자를 만들어 사용하게 됐다.
그런데 미터법의 사용을 위해선 우선 공통의 단위를 사용하는 데 대한 국가 간 합의가 있어야 했다. 1875년 5월 프랑스 파리에 모인 세계 17개국 대표가 서명한 ‘미터 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협약을 토대로 프랑스에 국제도량형국(BIPM)이 설치됐고, 미터원기는 1889년 이 기관이 주관한 제1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결정됐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와 북한을 포함한 55개국이 미터 협약에 가입했고, 70개국 이상이 미터법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미터 협약에 가입한 나라들은 7개의 기본 단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단위계’를 사용한다. 7개의 기본 단위는 길이를 나타내는 미터(m), 시간을 나타내는 초(s), 질량의 킬로그램(kg), 전류의 암페어(A),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칸델라(cd), 온도의 켈빈(K),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몰(mol)이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7개 기본 단위나 그것들의 조합으로 표시되는 단위로 나타낸다.
물론 나라마다 예전 단위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식 표준의 잔재인 ‘돈’ ‘관’(이상 무게)이나 ‘평’(토지 넓이) 등이 있다. 미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인치, 피트, 마일, 파운드 역시 국제표준은 아니다. ○ 표준의 과학
단위를 정의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합의와 더불어 그 단위를 구현하는 장치(측정표준)의 불변성이 보장돼야 한다. 오늘 사용하는 자의 눈금이 어제 사용한 것과 다르다면 측정값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혼란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 단위와 측정표준을 정하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1미터의 국제표준으로 만든 백금 미터원기도 온도와 기상여건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1960년 ‘크립톤-86(86Kr) 원자에서 나오는 스펙트럼 중 주황색 빛 파장의 165만763.73배’가 1미터로 새롭게 정의됐다. 그리고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1미터를 ‘빛이 진공 중에서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했다. 바뀐 정의에 따라 1미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의 파장’을 이용한다.
국제도량형국 같은 기구가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단위를 통일하고 동일한 측정표준을 사용하는 게 모든 나라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무역은 단위 통일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만약 한 나라에서 사용하는 자의 눈금이 다른 나라 자의 그것과 다르다면 한국산 TV에는 한국제 부품만, 일본산 휴대전화에는 일본제 이어폰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품이나 액세서리의 호환이 불가능해 자기 나라나 제3국에서 싼 부품을 구입할 수 없다. 결국 소비자와 기업의 부담이 엄청나게 커질 게 당연하지 않은가.
1981년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1986년에 KAIST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부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시간주파수표준 연구실에 근무하며 원자시계 개발과 대한민국 표준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 박사는 앞으로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서 일상생활의 사례를 통해 표준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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