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일기에 담긴 생생한 기억, 기록이란 위대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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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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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날이 갈수록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질 거예요. 종이와 잉크로 기억의 남은 흔적들을 적어 이들이 당신보다 더 오래 살게 할 수 없을까요?”

- 쿳시 ‘포(FOE)’
“덮어주세요.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 꽤 오랫동안, 새 일기장을 구입할 때마다 첫 페이지에 굵은 글씨로 공들여 썼던 글이다. ‘당신’ 이라고 칭했지만 주로 방청소를 해주시겠다며 몰래 서랍을 열어보시는 엄마와 ‘보라고 갖다 줘도 안 본다’고 주장하시면서도 큰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를 겨냥한 말이었다. 학교 검사용 대신 ‘진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에 접어들던 중학교 때부터였다. 일기 작법의 양대 명제인 ‘일기란 하루에 한 번 쓰는 것’ ‘기억할 만한 한 가지 주제로만 쓰기’를 무시하고 매일 발생한 갖은 사건들과 그에 대한 생각을 시시때때로 산만하게 나열했다. 매일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상당한 분량을 써댔기 때문에 몇 달 간격으로 새 일기장을 사야 했다. 당시 내겐 ‘이번에는 어떤 일기장을 살까’ 하는 고민만큼 즐거운 고민은 없었다. 중학교 때는 ‘안네의 일기’를 의식해 일기장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용한 속기(cipher)처럼 ‘거울문자(거울로만 볼 수 있는, 뒤집어쓰는 문자)’를 흉내내보기도 했다. 때로는 영화표를 붙이기도 했고, 영수증을 끼워놓기도 했다.

앨범이 우리의 육체적인 성장을 보여준다면, 일기는 한 인간의 인격적, 정신적 성장여로를 고스란히 담는다. 일기장에는 글씨체의 떨림이나 문장 끝에 찍은 말줄임표의 개수에서 느껴지는 그날의 감정뿐 아니라 좋아했던 가수의 활동 중단 소식에 흘렸던 눈물자국까지 남아 있다.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맛은 덜하지만, 대학 입학 후부터 컴퓨터에 쓴 일기에는 손으로 썼을 때 도달하기 힘든 방대한 분량의 글들이 저장돼 있다. 흔히 일기는 지극히 사적인 일들을 기록한 글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개인이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료가 되어 주기도 한다. 나치 집권 후, 암스테르담 유대인 거주 지역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숨어 지내며 썼던 안네의 일기나 충무공의 난중일기처럼 문학성을 인정받는 일기도 드물지 않다. 영국의 왕정복고기에 새뮤얼 핍스가 쓴 일기도 영미 문학에서 중요한 산문으로 인정받는다. 흑사병이나 런던 대화재 등 18세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동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이 드러나 있는 데다, 그의 소탈한 인간미가 글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쓴 소설 ‘포(FOE)’에도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로빈슨 크루소가 표류한 무인도에 사실은 수잔이라는 여성이 함께 있었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이 소설에서, 화자인 수잔은 끊임없이 ‘로빈슨 크루소’에서 배제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 모든 것은 잊혀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크루소에게 글이 없었다면, 그가 무인도에 표류한 날들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비가 내리는 날들로 뭉뚱그려졌을 것이다. 이 소설이 말하고 있듯, 시간이 흐르면 우리 삶은 고유의 독자성을 잃고 만다. 난파는 모두 같은 난파가, 조난은 다 같은 조난이 돼 버린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내 일기장들은 이제 서랍 대신 베란다 한쪽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다. 마치 문학전집처럼 책장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가족들이 볼까봐 애를 써가며 숨기지도, 보지 말라고 협박을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 그곳에서 예전 글들을 읽는다. 그러면서 혼자 한참 웃기도 하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해지는 한때의 생각에 늦은 밤까지 뒤척이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글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수백, 수천만 명의 삶 속에 묻혀 흐려져 버린 내 삶의 구체성을 복원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글쓰기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appena@naver.com  
톨이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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