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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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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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끝자락서 존엄치료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말기암 환자■ 국내선 생소한 치료법 참관기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 그들이 충격을 극복하고 평상심을 갖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말기 환자들의 자존감과 심리 상태를 보듬어주는 완화치료(존엄치료 포함)가 매우 중요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 그들이 충격을 극복하고 평상심을 갖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말기 환자들의 자존감과 심리 상태를 보듬어주는 완화치료(존엄치료 포함)가 매우 중요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존엄치료(Dignity Therapy)’는 환자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완화치료의 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본인을 포함한 누군가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치료기법이죠.

해외에서는 캐나다 마니토바대의 하비 맥스 초치노프 교수(정신과)와 일본 아이치 현 암센터 중앙병원 고모리 야쓰나가 박사(완화치료과)가 수년 전부터 시행해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이 두 사람이 함께 쓴 ‘존엄치료-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학지사, 김유숙 서울여대 교육심리학과 교수 번역, 2011년)를 통해서 소개만 됐을 뿐 치료에 적용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기사에 소개되는 강정화 씨(가명·65·유방암 4기)가 공식적인 첫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강 씨의 존엄치료 전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말기 환자의 마지막이 보다 윤택해질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만들어진다면, 본 기록은 그 자체로도 적잖은 의미를 지닐 것이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
“저는 병원에 올 때마다 ‘죽으러 간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병원에 오는 날이면 가슴이 뛰기 시작할 정도로 무서웠어요. 그런데 병원에 오는 걸 즐거움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 있었어요. 꼭 나 같다고 느낀 분이었어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산다면 이렇게 누구를 위해 뭘 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어요. 산다는 보장도 없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 팔만 나으면 저는 다시 일을 해서 진짜 많은 사람한테 조금씩, 조그마한 일이라도 뭔가 해주고 싶어요. 지금은 오른손이 저려서 조금만 쓰면 힘이 없어져요. 그래도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14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원자력병원 8층 호스피스 상담실. 김유숙 교수가 담담히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강정화 씨는 병색을 숨기려 낀, 알 없는 안경테 사이로 계속 눈물을 훔쳐냈다. 어디서도 꺼내본 적 없었던 자신의 얘기였다. ‘존엄치료’를 받기로 한 그는 앞선 8일 김 교수를 만나 가슴 깊이 묻어둔 얘기들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었다.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했나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본인의 기구한 인생이 서글펐던 것일까. 그는 이미 젖어버린 휴지를 왼쪽 뺨에 댔다 오른쪽 눈가에 댔다를 한참이나 반복했다.

“이렇게 잘 써주실지는 몰랐어요.”


모두 자신이 한 말이었다. 단지 글로 옮긴 뒤 어순만 조금 바꿨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몇 번이나 “잘 써주셔서 행복하다”고 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 내 삶은 정말 불행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한 건 순전히 어머니의 뜻이었다. 친정은 시골에서 제법 부유한 편에 속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농사일은 힘드니 반드시 서울로 시집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교사라는 남편의 직업도 어른들을 흡족하게 했다. 어머니는 신혼살림은 물론이고 결혼 6개월 후엔 집까지 마련해줬다.

남편의 성격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밥이 질다, 되다 하며 물리는 바람에 한 끼 식사를 세 번씩 차리기도 했다. 사시사철 한복을 입었고, 남편이 식사하는 동안에는 멍하니 곁을 지켰다. 출근할 땐 반드시 발밑에 구두를 ‘대령’해야 했다. 그런 건 그냥 하면 됐다. 문제는 술이었다. 남편이 술을 마신 날이면 늘 폭력이 뒤따랐다. 물건을 부수는 일도 다반사였다.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아 일곱 바늘을 꿰맨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죽을 쑤어 학교까지 갖다 바쳤다. 아무 병명도 없이 살이 빠져 겨우 33kg밖에 나가지 않던 때도 있었다. 모두들 화병이라고 했다. 그래도 헤어질 생각만큼은 하지 못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체면 때문이었다. 늘 서울 간 딸을 걱정하던 어머니가 떠올라서였다. 심신이 지쳐갔지만 그냥 참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효도는 못할망정 걱정까지 끼쳐드릴 수는 없었다.

7년 전이던가 8년 전이던가. 그게 언제라고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다. 이젠 굶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집이고 물건이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순순히 ‘놓아준’ 남편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이후로 아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자식 둘을 홀로 키우는 딸도 제 밥 벌어먹기가 바쁜지 통 연락이 없다. 서운해도 어쩌랴. 팔자가 그런걸.

“제가 참 바보같이 살았네요.”

■ 삶의 막바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다

14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한국원자력병원 호스피스 상담실에서 김유숙 교수(왼쪽)가 강정화 씨(오른쪽) 앞에서 존엄치료 문서를 낭독한 뒤 소감을 듣고 있다. 여기에는 이 병원
권신영 간호사가 기자와 함께 인증집단으로 참여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4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한국원자력병원 호스피스 상담실에서 김유숙 교수(왼쪽)가 강정화 씨(오른쪽) 앞에서 존엄치료 문서를 낭독한 뒤 소감을 듣고 있다. 여기에는 이 병원 권신영 간호사가 기자와 함께 인증집단으로 참여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강 씨의 굴곡진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8년 8월에 받아든 유방암 선고. 산을 잘 타 ‘수락산 다람쥐’라 불리던 그로선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고 오른쪽 유방을 도려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도 전이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두 차례의 방사선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 서너 번 약을 써 보고 효과가 떨어지면 다른 약으로 바꾸기를 세 차례. 한 번도 견디기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벌써 15번이나 받았다. 그마저도 효과가 없었던 걸까. 언젠가부터 오른쪽 팔이 퉁퉁 부어올랐다.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된 탓이라고 했다. 기분 전환삼아 꺼낸 예쁜 블라우스는 팔이 들어가지 않아 번번이 포기했다. 그래서 그는 늘 헐렁한 후드티 차림이다. 거무튀튀해진 손톱은 빨간 매니큐어로 가려지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에게 쓴 나의 편지, 닫힌 내 마음 활짝 열어줬어요▼

그는 자신의 얘기를 감추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다. 분명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임에도 주변 어떤 사람도 강 씨의 투병 사실을 알지 못한다. 퉁퉁 부은 팔도 그냥 넘어져 다쳤다고 둘러댔다. 지난해던가. 그는 500만 원만 모이면 어디로든 떠나려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몸이 아파도 꾸역꾸역 식당에 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300만 원쯤 모였을 때였다. 가끔 연락하던 조카가 갑작스레 2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절이란 걸 해본 적이 없던 그였다. 결국 ‘비밀 계획’은 연기됐다. 뒤늦게 투병 사실을 알고 달려온 올케가 무작정 병원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그 계획은 지금쯤 실행에 옮겨졌을지도 모른다.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두 사람을 만난 뒤부터다. 원자력병원 호스피스실의 권신영 간호사와 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전도사가 그들이었다. 사실 이름조차 생소한 ‘존엄치료’를 선뜻 받겠다고 한 것도 그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권 간호사가 권유해서였다.

“우리 선생님(권 간호사) 뵈면 살고 싶어져요. 내가 살아서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싶어요. 제가 권 선생님과 전도사님 때문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니까요.”

권 간호사는 존엄치료의 인증집단으로 참여했다. 김 교수가 강 씨와의 면담을 통해 작성한 문서(강 씨의 인생이 담긴)를 ‘인증’하는 것과 함께 인상적이었던 점을 공유하는 역할이다. 김 교수가 문서를 낭독하는 동안 권 간호사도 느낀 바가 많은 듯했다. 1년 가까이 돌봐온 환자지만 이렇게 깊은 속내를 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제가 누군가에게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간호사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더 잘해 드리지 못해서 송구스러웠고요. 강정화 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이고 보물이랍니다.”

강 씨는 작은 흐느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두고 ‘행운’이라 말했으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 당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김 교수는 앞서 이뤄진 강 씨와의 면담에서 9가지 질문을 했다. 모두 존엄치료 매뉴얼에 나와 있는 질문이다. 인생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나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당신 자신에 대해 소중한 사람이 꼭 알아주거나 기억하길 바라는 것, 소중한 사람에 대한 당신의 희망과 바람 같은 것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본인의 일생을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의미보다는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반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강 씨와 같은 피치료자들은 이 질문들에 답하면서 자신의 가장 빛났던 순간과 소중한 인간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상담자는 환자들의 발언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한 긍정적 메시지를 담은 문서를 작성한다. 이런 ‘편집행위’의 효과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1995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독가스 살포 사건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엮은 책)에 대해 기술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문장을 바꾸거나 어떤 것을 삭제하거나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온 것을 끼워 넣기도 한 엄밀한 몽타주의 작업이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처럼 철저하게 손을 봐서 만들어진 원고를 확인하기 위해 이야기를 해준 대상에게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나요?” 하면서 보여 주면 대부분 “네, 전부 제가 한 말이군요. 그대로 좋아요”라고 바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눈물이 난다. 이게 내 문장이라는 것보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기 때문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2009년

존엄치료의 효과는 하비 맥스 초치노프 캐나다 마니토바대 교수(정신과)의 여러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초치노프 교수는 2005년 8월 미국 임상암학회지(Journal of Clinical Oncology)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존엄치료를 받은 말기 암환자(100명) 중 76%가 존엄감 상승을, 68%가 목적의식 증가를, 그리고 47%는 살겠다는 의지의 상승을 나타냈다”고 보고했다. 그는 올 8월 영국 의학학술지 랜싯온콜로지(The Lancet Oncology)에 “존엄치료(108명)는 일반적인 완화치료(111명)나 심리적 지지요법(107명)에 비해 환자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 개선, 존엄감 상승 등에 더 큰 도움을 주었다. 존엄치료는 또한 일반적 완화치료에 비해 슬픔이나 우울함을 감소시키는 데도 더 큰 효과를 나타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렇다면 강 씨는 존엄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변화를 보였을까. 1일 사전미팅과 8일 본 면담에서 그는 남편을 ‘그분’이라 칭하며 극존칭을 썼지만, 14일 문서낭독 후에는 ‘별난 사람’, ‘못된 사람’이라는 직설적 단어를 사용했다. 또 딸이나 조카 등에 대해서도 ‘서운하다’, ‘억울하다’, ‘화가 난다’는 등의 표현을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친정식구들은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조금 달라진 뉘앙스를 풍겼다. “옥탑방에서 누가 한 명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혹시 혼자 있다가 못 일어나면 어떡해요.”

김 교수는 이런 변화를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이란 분석이다.

“강정화 씨는 그동안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한 두려움이 굉장히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포장해서 말하던 남편에 대해 직설적으로 ‘못됐다’, ‘별나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그만큼 본인의 자존감이 올라갔기 때문이에요. 또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은 이후 누군가에게 자신의 병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도 전이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김 교수는 강 씨에게 존엄치료를 통해 남겨진 문서를 딸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전할 생각이 없냐고 몇 차례나 물었다. 강 씨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요. 제 얘긴 그냥 제가 좋아하는 두 분(권 간호사와 전도사)만 알아주시면 돼요.”

김 교수는 강 씨와의 마지막 면담 결과를 반영해 ‘최종문서’를 만들었다. 한 통은 강 씨에게, 또 한 통은 권 간호사에게 전달했다.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인생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권 간호사에게 부탁하라는 당부와 함께. 과연 그런 날이 오게 될까.

“죽기 전에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말씀드릴게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너무도 야속하게 느껴지는 그의 뒷모습이었다.
■ 존엄치료와 인연맺은 김 교수
병마와 씨름한 가족사…마음으로 환자에게 다가가


김유숙 서울여대 교수는 심리학자다. 심리학자가 말기암 치료 병동 의사들 정도만이 관심을 가질 법한 ‘존엄치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이유는 뭘까.

김 교수는 지난해 가을 고모리 야쓰나가 교수를 ‘이야기치료 워크숍’에 초청하는 과정에서 처음 존엄치료를 접했다고 한다. “마치 운명을 만난 듯했어요.” 그는 간단한 설명만 듣고선 곧바로 고모리 교수가 준비 중이던 책을 번역하겠다고 나섰다.

그 배경에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오빠가 있었다. 만 50세의 한창 나이에 췌장암으로 숨진 오빠는 문학과 예술적 감각이 남달랐다. 오빠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전해들은 뒤 “내 지난 시간을 정리해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다”며 가장 먼저 노트북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바람을 실현하지 못했다.

“고모리 선생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내가 만일 10년 전 존엄치료라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요. 오빠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문서로 남길 수 있었을 것이고, 제 조카에겐 소중한 유산이 됐겠죠.”

김 교수의 남편도 지금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는 언젠가 남편에게도 존엄치료를 시행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는 직업이 아닌 마음으로 환자들을 대하고 싶어 한다.

김 교수는 강정화 씨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비록 공식적인 치료 과정은 세 번의 만남으로 끝났지만, 원한다면 개인클리닉인 ‘한스카운셀링센터’에 언제든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강 씨는 “행복하다”를 반복하며 감사해했다. 어쩌면 권신영 간호사와 전도사 외에 김 교수가 강 씨의 세 번째 ‘소중한 분’이 될지도 모르겠다.

원자력병원에서는 기자에게 존엄치료를 받을 예정인 환자를 2명 더 소개했다. 그중 한 명은 폐암말기의 33세 미혼남성. 홀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그에겐 존엄치료가 생전에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듯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정중히 치료를 거절했다. 김 교수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지를 재차 나타냈고, 그는 드디어 17일 존엄치료에 동의했다. 그가 김 교수를 면담하는 날은 22일. 그러나 병세가 악화돼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면담이 가능할지는 그날이 돼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병원 측이 전했다. 아무쪼록 그가 존엄치료를 통해 남은 생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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