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멧돼지 사냥을 나섰다… 추격 이틀만에 탕! 농촌의 무법자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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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5일 0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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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서 유해동물구제단과 함께한 ‘숨막혔던 1박2일’

먹을게 없어서일까, 인간이 키운 작물에 맛을 들였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멧돼지들이 논밭에 침입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놈들이 쓸고 가면 논밭은 쑥대밭이 된다. 유해동식물구제에 나선 김무섭 포수(왼쪽)가 잡은 멧돼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먹을게 없어서일까, 인간이 키운 작물에 맛을 들였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멧돼지들이 논밭에 침입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놈들이 쓸고 가면 논밭은 쑥대밭이 된다. 유해동식물구제에 나선 김무섭 포수(왼쪽)가 잡은 멧돼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정면을 주시하던 포수가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놈’ 귀는 수십 m 밖에서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요. 사람 냄새만 나도 줄행랑을 칠 만큼 후각도 뛰어나죠.”

갑자기 100m쯤 밖에서 나무 사이로 거뭇한 물체가 휙 지나갔다. 이틀 동안 그놈 얘기를 듣고 흔적만 봤을 뿐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던 터. ‘설마 그놈일까’란 생각에 눈을 의심했다.

몇 초 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맹수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육중한 덩치. 그놈이었다. 긴장과 흥분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급하게 그놈을 가리키려는 순간 곁에 앉은 포수가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는 이미 조준까지 마친 상황. 포수가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지만 그놈은 낌새를 채고 한 발 앞서 몸을 피했다. ‘탕!’ 두 번째 총성. 역시 빗나갔다. 놈은 어느 새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놈과의 첫 만남이었다.

○ 그놈을 찾아나서다


그놈은 엄청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하다. 한번 속도가 붙으면 시속 40km는 거뜬하다. 긴 주둥이와 뾰족한 엄니는 놈이 가진 치명적인 무기. 흥분하면 매우 위험해 예전엔 호랑이조차 접근을 꺼렸다고 한다.

그놈은 바로 멧돼지다. 멧돼지는 몇 해 전부터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농가에 내려와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도심의 주택·식당가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얼마 전에는 한 노인이 멧돼지에게 물려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대체 멧돼지는 어떤 놈이기에 이렇게 말이 많을까. 궁금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멧돼지 사냥에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멧돼지 사냥 이렇게… 멧돼지 사냥은 보통 철저한 협업으로 이뤄진다. ‘몰이꾼’이 산세와 멧돼지 흔적 등을 파악해 사냥 범위를 좁혀주면 ‘개포’(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며 초기 사냥을 하는 포수)가 나선다. 멧돼지가 도망치면 상목, 중목, 하목으로 나뉘어 길목을 지키던 ‘목포’가 마무리를 한다. ‘대장’은 전체적인 현장 지휘를 맡는다.
멧돼지 사냥 이렇게… 멧돼지 사냥은 보통 철저한 협업으로 이뤄진다. ‘몰이꾼’이 산세와 멧돼지 흔적 등을 파악해 사냥 범위를 좁혀주면 ‘개포’(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며 초기 사냥을 하는 포수)가 나선다. 멧돼지가 도망치면 상목, 중목, 하목으로 나뉘어 길목을 지키던 ‘목포’가 마무리를 한다. ‘대장’은 전체적인 현장 지휘를 맡는다.
약속 장소인 경북 문경에 도착한 시간은 6일 오전 10시경. 기자와 동행하기로 한 사냥꾼들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 장소는 문경시 마성면과 가은읍 사이 야산 일대. 부근엔 수확기를 맞은 황금빛 논이 눈앞에 넘실대고 있었다. 밭에선 고구마 배 밤 깨 등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논밭에 좀 더 접근해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훼손된 곳이 많았다. 어떤 곳은 마치 경운기가 지나간 듯 넓게 파헤쳐져 있었다. 기자를 안내하던 김만태 포수(57)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게 전부 멧돼지들이 ‘삶아서(파헤치고 훼손했다는 뜻)’ 그런 겁니다. 이 지역은 논밭이 주변의 산과 맞붙어 있는 데다 토양까지 푹신푹신해 야생동물에겐 천국이죠.”

이날 사냥에 나선 사람은 모두 유해동식물구제단의 회원들. 유해동식물구제단은 탤런트 송재호 씨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야생동식물보호관리협회(환경부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는 법정단체) 소속이다. 공식적인 수렵허가 기간(11월 1일∼2월)이 아님에도 그들이 문경에 온 이유는 수확기를 맞은 논밭이 야생동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어서다. 멧돼지 고라니 등에게 피해를 본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지방자치단체들은 엄격한 자격 요건을 갖춘 모범 사냥꾼들을 뽑아 유해동식물구제단을 구성해 운용하고 있다.

○ 그놈을 추적하다

멧돼지들은 진흙 목욕을 즐긴다. 놈들이 남기고 간 목욕 흔적은 추적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베테랑 포수 두 명이 멧돼지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물웅덩이를 살펴보고 있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멧돼지들은 진흙 목욕을 즐긴다. 놈들이 남기고 간 목욕 흔적은 추적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베테랑 포수 두 명이 멧돼지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물웅덩이를 살펴보고 있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사냥꾼들과 간단하게 인사만 한 뒤 바로 멧돼지 추적에 나섰다. 사냥대장 역할을 맡은 경력 20년의 윤석재 포수(50)는 “멧돼지는 3일 이상 같은 산에 머물지 않는다”면서 “주로 밤에 이동하는데 하룻밤 사이 10km 넘게 이동할 때도 있다. 하루 안에 끝을 본다는 생각으로 잡아야지 내일로 미루면 다른 산으로 가고 없다”며 서둘렀다.

하지만 막상 추적하려니 막막했다. 주변은 온통 산과 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윤 포수는 “일단 동네 주민들의 신고나 제보가 우선”이라고 했다. 농작물 피해 신고가 들어오거나 인근에서 멧돼지를 봤다는 제보가 있으면 일단 그 주변으로 수색 범위를 압축한다는 얘기다. 다음은 몰이꾼이 나설 차례. 몰이꾼은 보통 지역 지리에 밝고 산을 잘 타는 사람이 맡는다. 또 눈이 밝고 멧돼지의 습성까지 잘 알아야 한다. 몰이꾼은 산을 돌면서 멧돼지가 이동할 만한 경로를 파악하고 발을 뜬다. 발을 뜬다는 건 멧돼지 발자국을 보고 크기와 지나간 시점 등을 알아낸다는 의미. 몰이꾼이 사냥 범위를 더 좁혀주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된다.

기자는 일단 ‘개포’를 따랐다. 개포는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며 초기 사냥에 나서는 포수. 이날은 개포 3명이 사냥개 세 마리를 앞세워 능선을 따라 추적했다. 개포가 사냥에 실패하면 길목에 잠복한 포수인 ‘목포’가 마무리를 짓는다. 대장의 역할은 전체적인 현장 지휘. 대장은 무전기로 멧돼지의 이동 경로와 현재 상황을 포수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개포를 따라 이동하던 중 유독 큰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조남민 포수(38)가 말했다. “멧돼지 발자국인데 ‘묵발’(묵은 발자국의 준말)이네요.”

이후 멧돼지가 다닐 만한 경로를 따라 서너 시간을 더 살폈다. 그러다 멧돼지가 다녀간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갑자기 현장에 긴장감이 돌았다. 땀샘이 없는 멧돼지는 진흙 목욕으로 체온을 식히고 피부에 있는 벌레를 털어낸다. 그런데 방금 발견한 물웅덩이엔 탁한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주변엔 ‘새발’(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도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다녀간 지 두세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 논밭 쑥대밭… 농민들 “멧돼지 좀 싹 쓸어 주이소” ▼

발자국을 본 김무섭 포수(39)는 “이놈이 그놈”이라며 흥분했다. 얼마 전 멧돼지를 쫓다 수퇘지 한 마리에게 사냥개 네 마리가 죽음을 당했는데 이동 경로나 발자국 크기 등으로 추정할 때 그때 놓친 수퇘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었다.

물웅덩이를 확인한 뒤부터 사냥꾼들이 분주해졌다. 사냥개들도 코를 킁킁거리며 바빠졌다. 갑자기 사냥개 한 마리가 꼬리를 바싹 말아 올리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른 개들이 뒤를 따랐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개를 쫓아 현장에 가보니 멀리 고라니 한 마리만 보였다. 김 포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개들을 불러 모았다.

이후 1시간쯤 더 살폈을까.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조 포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냥꾼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멧돼지가 도망간 것 같네요. 일단 오늘은 이만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놈이 없다


사냥꾼들은 개들의 목에 달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발신기가 알려주는 정보를 수신기로 받아 멧돼지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사냥꾼들은 개들의 목에 달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발신기가 알려주는 정보를 수신기로 받아 멧돼지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문경=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이날 밤 기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사냥에 동참했다. 고라니 멧돼지 등 짐승들은 대개 야행성이다. 해가 진 뒤 먹이를 찾아 헤맨다. 캄캄한 밤에는 논밭으로도 자주 내려온다. 그래서 주로 산을 타며 이뤄지는 주간사냥과 달리 야간사냥에선 산과 인접한 논밭을 훑으며 그곳에 침입한 짐승들을 잡는다. 물론 야간사냥은 자격을 갖춘 일부 사냥꾼에 한해 지자체가 시기와 장소 등을 엄격하게 제한해 허용한다.

베테랑 포수 2명과 함께 지프차에 탔다. 한 70대 할머니가 뛰어오더니 수확한 배를 쥐여주며 부탁했다. “우리 논도 꼭 훑어 주이소.” 이광웅 포수(70)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저분들은 멧돼지의 ‘멧’자만 들어도 잠을 설쳐요.”

멧돼지로 인한 피해액은 지난 몇 년 사이 크게 늘었다. 한국야생동식물보호관리협회에 따르면 2002년 30억 원 규모였던 연간 피해액은 최근엔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몇 년 동안 관리한 과수 나무도, 애지중지 기른 벼이삭도 멧돼지가 쓸고 가면 황무지로 변한다.

멧돼지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포수는 “어느 정도 개체수를 줄여주는 게 멧돼지도 사는 길”이라고 했다. 현재 멧돼지에겐 천적이 없다. 한 배에 10마리 가까이 새끼를 낳으니 그대로 두면 개체수가 급증해 먹이가 더 부족해진다.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먹이를 찾아 농가로 내려오고, 당연히 농민 피해도 늘어난다. 밀렵이나 무분별한 사냥은 금지해야 하지만 허가된 사냥을 통해 개체수를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서치라이트로 캄캄한 논밭을 밝히며 이동하던 중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다.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고라니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는 게 이 포수의 설명. 30분 뒤 깨밭에서 또 한 마리의 고라니를 발견했다. 정신없이 깻잎을 뜯고 있었다. 이 포수가 그곳을 향해 서치라이트를 비췄다. 야행성인 고라니는 환한 불빛에 잠시 눈이 멀어 얼어붙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수석에 있던 김만태 포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상황은 한 방으로 종료됐다. 고라니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김 포수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다음 생애엔 좀 더 행복한 곳에서 태어나라.”

이날 밤 기다리던 멧돼지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멧돼지들은 최근 자정을 지나 논밭에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영리하고 적응력이 강한 멧돼지들은 사냥꾼들이 경찰서에 총기를 반납하는 시간 이후를 노린다는 게 김 포수의 설명이었다.

○ 결국 잡다

사냥 이틀째 날. 아침 일찍 사냥꾼들이 모였다. 서로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일단 전날 사냥에 실패한 산으로 향했다. 아직 멧돼지가 떠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서다. 하지만 오전 내내 산을 훑었음에도 흔적만 발견했을 뿐 멧돼지를 만나지는 못했다. 나중에 발견한 발자국은 능선을 따라 옆쪽 산으로 나 있었다.

결국 오후에 발자국이 향해 있는 산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두 시간 넘게 다시 그곳 산세를 파악했다. 개포가 멧돼지를 추적할 지점과 목포가 목을 지킬 장소를 상의해 정했다.

기자는 이번엔 상목(위쪽 길목)을 지키는 조명식 포수(52)의 곁에서 멧돼지를 기다렸다. 조 포수는 “목은 일단 시야가 탁 트인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멧돼지는 습성상 항상 다니는 길로만 움직여요. 멧돼지가 자주 다닐 만한 곳, 특히 길이 교차하는 곳을 목으로 정하는 게 좋죠.”

목을 잡은 뒤엔 인고의 시간. 언제 멧돼지가 나타날지 몰라 무전기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대화도 속삭이듯 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렸다.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새소리만 울렸다. 모기떼의 습격에 몸을 긁적이고 있을 무렵 갑자기 무전기에서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돼지가 그쪽으로 간다.”

얼마 뒤 덩치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조 포수의 빠른 손놀림보다 멧돼지가 더 빨랐다. 두 방을 쐈지만 총알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멧돼지가 빠져나간 자리만 바라보고 있을 즈음 또 한 번 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울렸다. “지금 멧돼지 한 마리를 추격 중이다.”

기자는 목을 벗어나 대장의 인도에 따라 개포가 멧돼지를 추적한다는 곳으로 움직였다. 멀리서 사냥개들이 한창 멧돼지를 쫓고 있었다. 사냥개가 멀리 사라진 뒤엔 개의 목에 걸린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발신기가 알려주는 정보에 따라 현장으로 갔다. 사냥개들은 작은 멧돼지 한 마리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철중 포수(47)가 조심스럽게 멧돼지를 겨냥했다. ‘탕!’ 멧돼지는 그대로 쓰러졌다. 잡힌 녀석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수퇘지. 전날부터 쫓던 놈은 아니었지만 농가에 피해를 주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쓰러진 멧돼지를 보자 멧돼지를 잡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살기 위해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와야만 했던 한 생명에 대한 측은함도 느껴졌다. 사냥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내내 잡은 멧돼지 생각이 났다. 서로 다른 심정이 교차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경=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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