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 스님은 신라인이지만 우리 절의 자랑입니다. 한국과 함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 어떻겠습니까. 도와주세요.”
“좋습니다. 이제 1300년 만에 혜초의 꿈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723∼727년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간다라 페르시아 파미르고원 둔황(敦煌)을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까지 2만 km에 걸친 구법여행을 하고 이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으로 남긴 신라 승려 혜초(704∼780년경). 신라에서 태어났지만 ‘세계인’이었던 혜초의 흔적이 중국에서 되살아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루트를 답사 중인 동국대 혜초원정대는 6일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시 셴유(仙遊)사를 찾아 셴유사 주지 룽탄(龍潭) 스님을 만나 혜초기념관을 함께 건립하기로 약속했다.
셴유사는 혜초가 3년간 기거하면서 밀교를 연구하고 불도를 닦았던 곳. 여기서 황제의 부탁을 받고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장안에서 혜초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혜초의 정신을 기리는 데 있어 셴유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6세기 말 수나라 때 창건된 셴유사는 수와 당의 황제를 비롯해 백거이 소동파 등 유명 문인이 즐겨 찾았던 명찰. 수나라 문제가 법왕탑 등 100기의 사리탑을 세울 정도로 번창했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은 데다 물이 휘돌아 나가 풍광도 빼어났다.
중국 시안 시 셴유사 옆에 있는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 2000년 셴유사와 한국의 조계사가 함께 세웠으나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낙서로 인해 표면이 온통 긁혀 있는 상태다.(위에서 왼쪽), 훼손된 혜초기념비각의 기둥.(위에서 오른쪽), 중국 시안 시 셴유사 전경. 셴유사는 혜초 스님이 생활하면서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수·당대 중국의 명찰이었으나 2001년 이건하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혜초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아래) 시안=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2001∼2003년 댐 건설로 사찰이 수몰될 위험에 처하자 500m 정도 떨어진 맞은편 언덕으로 이건했지만 재원 부족으로 변변한 건물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기와집도 아니다. 붉은 벽돌에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린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벽돌 조각을 무질서하게 얹어 놓았다.
셴유사가 이처럼 어렵다 보니 20여 m 떨어진 곳에 있는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도 관리가 엉망이다. 이 기념비는 2000년 한국의 조계사와 셴유사가 함께 세웠다. 기둥은 기울고 여기저기 표면이 벗겨졌으며 낙서로 훼손된 상태다. 비의 표면도 온통 낙서투성이였다.
혜초원정대 대원들은 황량한 사찰과 방치된 혜초기념비를 보고 모두 숙연해졌다. 그러나 “이곳에 혜초기념관을 함께 건립하자”는 룽탄 스님의 제안에 표정이 밝아졌다. 동국대 정각원장 법타 스님은 “기념관 건립을 통해 혜초의 꿈이 되살아나게 됐다”며 “동국대 불교계가 함께 올해 안에 구체안을 마련해 이르면 내년 말까지 사업을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원정대장인 윤재웅 동국대 교수도 “설계부터 재원 마련, 건립 과정을 모두 공동으로 진행하고 불교계의 지원을 이끌어내겠다. 시안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는 명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표시했다.
동국대는 동아일보와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개최한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을 계기로 혜초원정대를 결성해 현재 20일 동안 중국 시안∼둔황∼투루판∼쿠처∼카슈가르∼파키스탄 탁실라∼라호르∼인도 뉴델리 구간의 혜초 구법기행 루트를 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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