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반전 거듭 추리코믹, 객석 뒤집다

  • 동아일보

◇日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대본★★★★ 연기★★★☆ 연출★★★★ 무대★★★☆

아이돌 여배우 키사라기 미키 1주기를 맞아 30층 빌딩 옥상에 모인 다섯 명의 오타쿠들. 인터넷 팬클럽 아이디로 왼쪽부터 기무라 다쿠야(김원해) 딸기소녀(염동헌) 이에모토(김남진) 스네이크(김민규) 야스오(윤상호)의 기막힌 반전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CJ E&M 제공
아이돌 여배우 키사라기 미키 1주기를 맞아 30층 빌딩 옥상에 모인 다섯 명의 오타쿠들. 인터넷 팬클럽 아이디로 왼쪽부터 기무라 다쿠야(김원해) 딸기소녀(염동헌) 이에모토(김남진) 스네이크(김민규) 야스오(윤상호)의 기막힌 반전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CJ E&M 제공
이토록 반전이 많은 연극이 또 있을까. 처음엔 안단테로 시작하더니 40여 분이 지나고부터는 모데라토 알레그로 프레스토로 빨라지며 2시간이 넘는 공연시간을 숨 가쁘게 몰아친다. ‘이게 끝이겠지’ 하는 순간 다시 터져 나오는 반전의 연속에 숨이 가쁠 정도다.

단언컨대 낯선 일본 여성 이름을 길게 내건 제목 때문에, 또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오타쿠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점 때문에 거부감이 든 관객일수록 이 작품에 더 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상상했던 그 모든 것을 차곡차곡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연극의 7할은 극작가 고사와 료타의 극작술에 의존한다. 시추에이션 코미디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웃음의 대학’ 작가 미타니 고키와 추리소설의 대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합쳐놓은 듯한 극작가다. 그만큼 황당한 웃음과 빈틈없는 추리력을 함께 갖췄다는 뜻이다.

2003년 연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2007년 제작된 동명 영화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본디 무대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연극에서 더 빛을 발한다. ‘키사라기 미키’라는 자살한 아이돌 스타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같은 다섯 사내에게 현실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무대 위 연기가 나머지 3할을 차지한다.

워낙 반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고선 리뷰를 쓰기 힘들다. 여기까지 기사를 읽고 이 작품을 보기로 결심했다면 여기서 읽기를 멈추고 연극을 보고난 뒤 다시 읽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우선 극의 제목과 포스터에 나오는 선정적 여배우는 결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의문의 자살을 한 그의 1주기를 맞아 폐쇄된 공간에서 처음으로 만난 인터넷 팬 카페 회원들의 ‘환상 속 그대’로만 묘사될 뿐이다. 그렇게 모인 열혈 팬 다섯은 대부분 인터넷상의 가상이름과 실상의 괴리가 큰 ‘찌질남’이다.

팬 카페 호스트이자 키사라기에 대한 최고의 수집광 이에모토(김남진), 시골서 상경한 ‘형광등’ 야스오(윤상호), ‘폼생폼사’ 스네이크(김민규), 외모에 민감한 기무라 다쿠야(김원해) 그리고 누가 봐도 변태로 의심될 만한 중년사내 ‘딸기소녀’(염동헌)다. 뭐 여기까지는 반전이라고 할 것도 없다. 오히려 관객의 예측과 딱 들어맞는 캐릭터들이다.

유일한 예외는 번듯한 외모와 직장을 지닌 이에모토다. 이에모토란 어떤 기예에 정통한 가문, 종가(宗家)를 뜻한다. 키사라기에 관한 한 그가 가장 정통하다란 의미다.

이야기는 키사라기의 죽음이 타살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추리극으로 변모한다. 다섯 캐릭터는 이 순간부터 사회적 논란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의 축도가 된다. 이에모토가 주류 합리주의자를 대변한다면 기무라 다쿠야는 비주류 음모론자의 전형이다. 스네이크는 이쪽저쪽 기웃거리는 ‘철새’이고, 야스오는 차 떠난 뒤 손 흔드는 ‘뒷북’이다. 딸기소녀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희생양’이다.

관객은 이에모토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나머지 네 괴짜의 정체를 파고든다. 반전을 거듭하며 그들의 정체가 하나둘 밝혀지지만, 가장 큰 반전은 이에모토야말로 가장 비정상적 인물이란 발견이다. 공연 내내 자신의 우월함을 확신하며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던 이에모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그 순간 ‘마지막 청순파’ 키사라기의 실체에 대한 마지막 반전까지도 예감할 수 있다.

바퀴벌레 살충제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극적 구성력 못지않게 이 작품을 빛내는 요소는 이 같은 자기풍자다. 이 연극은 전후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와 오타쿠 문화에 대한 찬가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자기풍자다. 대중적 허상에 취해 실상을 희생시키며 살아가는 현대 일본인의 자기소외 현상을 숨 가쁜 웃음으로 통타하는 자기풍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웃음의 대학’과 ‘연애희곡’ 등 일본희극 전문 이해제 씨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김한 최재섭 박정민 이철민 김병춘 씨로 구성된 미키 팀이 번갈아 공연한다. 8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컬처스페이스엔유. 2만∼4만5000원. 02-501-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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