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현실주의 정치학자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사진)이 17일 내놓은 회고록 ‘중국에 관하여(On China)’에서 6·25전쟁 분석을 시도했다. 18개 장 58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중 34쪽에 이른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과 중국, 옛 소련의 권력관계를 송두리째 변화시킨 6·25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만 해도 국제무대에서 가장) 존재감이 적었던 북한 김일성의 계략(machinations)을 통해 시작됐다”고 적었다.
이와 함께 “기본적으로 6·25전쟁은 미국과 중국, 소련이라는 3개의 국가가 서로 상대에 대해 잘못된 전략적 판단과 계산을 하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분석했다.
스탈린은 1949년부터 거듭된 김일성의 계속된 남침 승인 요구에 대해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거부해 오다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마침내 남침계획을 승인했다. 영국 정보부 출신 소련 스파이인 도널드 매클린을 통해 입수한 미 국가안보회의(NSC) 극비문서(NSC-48/2·1949년 12월 30일 작성)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문서에 담긴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어선 외곽에 있다’는 대목을 보고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는 것. 이 내용은 ‘애치슨라인’으로 알려진 1950년 1월 ‘애치슨 연설’에서 공표되지만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극비문서에서도 이 내용이 확인됨에 따라 미국의 개입 불가를 신뢰할 만한 정보로 확신하게 됐다는 것.
한편 유엔을 통한 군사 개입을 결정한 미국은 “오랜 내전으로 지친 신생국 중국의 군사적 역량을 고려할 때 쉽게 6·25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미국의 유엔군 파견을 “미국이 중국 본토와의 전면전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는 것.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과 중국은 상대방의 전략적 계산에 대한 오해로 충돌을 향해 나아갔다”고 강조했다.
또 키신저 전 장관은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은 1950년 10월 미군이 38선 이북을 넘어 두만강으로 북진하자 내려진 것이란 전통적인 분석과 달리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 후 미군이 곧바로 참전을 결정한 때부터 이미 중국군의 전쟁 개입을 계획했다”고 강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의 참전은 중국이 장기적 측면에서 한반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현대에 와서도 보다 유의미한 측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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