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올인’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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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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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커계 평정한 힘은 서러움에서 나왔다

이병헌이 주인공으로 나온 TV 드라마 ‘올 인(All In)’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 프로바둑 4단(60)은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그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어려서 운동한 덕에 몸매도 탄탄하다. 그는 여전히 카지노 관련 업무를 하고 있고, 한국기원에서 바둑팀 감독으로도 뛰고 있는 잘나가는 현역이다.

그런 그에게 1984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미국 생활 8년차(당시 33세)였던 그해 1월 그는 막막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더니 열쇠가 맞지 않았다. 부인이 열쇠를 바꾼 것으로 사실상 이혼 통고였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 가 리커스토어(주류판매점)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찾았지만 카지노를 드나든 게 화근이었다. 여기에 부인과의 성격 차이도 한몫해 가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한번 금 간 결혼생활은 선을 넘어 버렸다. 결국 아내에게 전 재산과 아이들을 넘기고 이혼했다.

○ 어머니의 문전박대 “모자 인연 끊자”

얼마 뒤 빈털터리로 귀국했다. 어머니 집을 찾았으나 돌아온 것은 냉대뿐이었다.

“그 많던 재산 다 넘겨주고…. 나이 삼십도 넘은 놈이…. 집에서 나가라.” 그의 가방은 마당으로 던져졌다. 귀염받던 막내아들인 그의 상심은 컸다. ‘모자의 연을 끊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허름한 여관에서 5, 6개월을 지냈다. 인생 밑바닥이었다. 명색이 프로기사였지만 바둑으로 생활할 형편도 안 됐다. 주변에선 미국에서 잠깐 집에 들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먹고살 게 없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해 7월 어머니가 김포공항에서 30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지만, 그는 그 봉투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연락하지 말고, 유산도 남기지 말라”고 모진 말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어머니 부탁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누나에게서 어머니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몇 달을 울고 지냈다. ‘너는 누나가 돼서 동생 생사도 모르고 있느냐. 어서 찾아가 봐라’고 말했다”고 했다. 어머니와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화해했다. 당시 사업도 하던 그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와는 달랐다. 입술을 깨물고 그를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혼당한 데다 집에서도 쫓겨난 차 4단의 마음에는 오직 성공이라는 두 글자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차피 홀로 서야 한다. 이제는 성공해서 보여줄 것이다. 이후로는 철인으로 변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의 수중에는 18달러밖에 없었다. 그는 절박했다. 20달러 내기바둑으로 돈을 모아 1600달러를 만든 뒤 다시 카지노에 입성한다. 그때 그의 카드 실력은 바둑으로 치면 강1급 정도. 이미 1970년대 말 카드의 고수인 스승 2명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실력이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 교수인 치프 존슨과 단 게롯이 그들이었다. 아마 바둑 3단 정도인 존슨에게는 바둑을 가르치는 대가로 포커를 이론적으로 배웠다. ‘포커는 확률’이란 점을 깊게 새겼다. 주한미군 출신으로 ‘미캐닉(기계·우리말로 타짜)’으로 불리던 게롯에게는 김치를 갖다 주며 인간적으로 친해져 그의 카드 사기기술 수백 가지를 배웠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실력으로 카지노업계에서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톱클래스가 되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 실전경험을 쌓아간다.

○ 실력 차이 많이 나는 포커는 ‘학살’

2년 뒤인 1986년부터 그는 카지노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해부터 1997년까지 포커게임 수입 1위를 기록한다. 당시 한 해에 250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한 해 100만 달러를 넘게 버는 갬블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많이 나갔다.

“포커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틀렸다. 사실 실력이 100%다. 바둑이나 골프 같은 운동은 잘 못하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지만, 포커는 핸디캡을 주는 경우가 없다. 바둑으로 치면 프로나 아마추어나 모두 맞바둑을 두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들이 같이 포커를 친다는 것은 사실상 학살에 가깝다.”

차 4단은 “바둑에 기재가 있고, 연예인에게 끼가 있듯이 카드에는 카드를 이해하는 독해력, 즉 ‘카드센스’가 있어야 한다”며 “숫자에 대한 감각은 물론이고 승부근성과 배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짱이 지나치면 만용이 된다고 충고한다.

“내 승부근성은 어려서 기원에 다닐 때 했던 내기 사탕바둑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기원 할아버지가 먼저 사탕을 듬뿍 주고는 내기 바둑을 두자고 했는데, 사탕을 뺏기기 싫어 악착같이 뒀던 것 같다. 사탕을 잃으면 얼마나 분하던지….”

○ 조훈현과 100여 차례 대국

그가 바둑을 배운 것은 일곱 살 때. 이종사촌 형들의 바둑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기원에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웠다. 당시 기원을 다니는 아이가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4남매의 막내로 유복자인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다. 그의 집은 예식장을 하다가 영등포 경흥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부잣집이었다. 그는 어려서 15가지를 배웠다. 당수 쿵후 수영 탁구 같은 운동뿐 아니라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도 부는 것 빼고는 거의 배웠다. 한때는 바이올린으로 대학을 가려 했을 정도다. 대학 때 피아트 자동차를 몰기도 했다.

그는 혼자 하는 모든 게임에 강했다. 미국 이민 첫날에 조카들로부터 체스의 룰을 듣고 나서는 맞붙어 곧바로 이겼다. 바둑 장기의 고수이기에 가능했다. 고3 때 그는 고1인 서봉수와 기원에서 만난다. 당시에는 3점을 접어줬으나 얼마 안 돼 맞바둑이 됐다. 서봉수는 1970년 입단했고, 그는 74년 입단했다. 그해 그는 공군에 입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친구가 많지 않던 조훈현 당시 6단과 만난 것도 그해였다. 100차례 이상 바둑을 뒀다는 둘은 지금도 막역한 사이다.

그는 1997년 프로 갬블러 세계를 떠난다. “그해 어머니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가장 귀여워했지만 불효했던 내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포커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외국인들이 돈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카지노를 늘려야 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 때문인지 2005년에 한국관광공사 카지노회사 상임이사가 됐다. 서울힐튼호텔과 부산롯데호텔에서 문을 여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영업과 객장관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다.

“카지노라는 게 종합엔터테인먼트산업인데 단순히 도박산업으로만 생각하는 게 안타깝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15% 정도만 카지노 수입이다. 그 1.5배가 회의 등 각종 컨벤션 수입이고, 또 카지노 수입의 3배가 쇼핑 수입이다.”

그는 요즘도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의 회장으로 카지노 컨설팅 업무를 해주고 있다. 남태평양 피지 정부가 카지노 개설 업무를 준비 중인데 거기에 입찰을 해놓고 준비하고 있다. 그의 e메일 ID ‘mrtwice1’도 포커와 관련이 있다. 이 ID는 그의 호적수이자 동료였던 프로갬블러 ‘치프 리즈’가 부른 별명에서 따왔다. 리즈는 남들처럼 그를 ‘지미지미’(차민수의 미국 이름인 지미 차에서 나온 별명)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지미)이 두 번 불린다는 것에 착안해 ‘트와이스’란 단어를 썼고, 존경한다는 의미로 ‘미스터’를 붙였다.

또 그는 다른 승부의 세계인 바둑에도 열심이다. 지금은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하는 8개팀 중 하나인 ‘한게임’의 감독으로 이영구 윤준상 진시형 한태희 류재형 이태현 등 팀 소속 프로기사들에게 “승부가 뭔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의 승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글=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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