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쌀 한 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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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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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가득한 날, 정용규 그림 제공 포털아트
햇살 가득한 날, 정용규 그림 제공 포털아트
현우 아빠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아홉 살인 아들이 밥을 먹지 않고 햄버거와 피자, 통닭, 외식업체의 스테이크 같은 것만 찾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치고 구슬려도 아이는 막무가내로 밥을 먹지 않습니다. 가난한 집 6남매의 막내로 자란 현우 아빠는 지금도 배가 너무 고파 정신이 몽롱해지던 어린 시절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사로운 봄날, 장독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망연한 표정으로 세상을 내다보던 아홉 살 시절에 그는 하얀 쌀밥을 원 없이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쌀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밥을 안 먹느냐고 아빠가 나무라자 현우는 단박에 이렇게 되받아쳤습니다. “서양 사람은 쌀 안 먹고 빵하고 고기만 먹고도 잘살잖아.” 심지어 아이는 햄버거와 피자가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기계를 발명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현우 아빠는 아내와 상의하여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밥을 먹지 않겠다면 밥을 주지 말 것, 밥 외의 배달음식을 일절 시켜주지 말 것, 밥을 먹을 때까지 용돈도 주지 말 것.

쌀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한 현우 아빠의 의도는 엉뚱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현우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햄버거를 사먹으며 버틴다는 걸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에게 처음으로 회초리를 댄 현우 아빠는 속이 너무 상한 나머지 절친한 이웃사촌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철없고 배부른 세대의 편식을 개탄했습니다. 어린 시절 배가 너무 고파 햇살 따사로운 장독대 옆에 혼자 앉아 있던 기억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한 뒤에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한심한 놈들, 너희가 쌀맛을 알아?”

예전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나무에 탐스럽게 핀 꽃을 흰 쌀로 지은 이밥으로 보아 ‘이팝나무’라는 명칭이 생겼을까요. ‘여자로 태어나 처녀로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을 못 먹는다’는 말도 당대의 궁핍을 반영하는 극단적인 척도입니다. 민생고(民生苦)란 말을 모르는 세대는 이런 말을 판타지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얘기로 치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밥 먹으러 가자’는 말 대신 ‘민생고 해결하러 가자’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쌀로 놓고 보자면 지금은 태평성대가 분명합니다. 가뭄과 흉년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고 지금은 무슨 쌀을 먹을 것인가를 고심하는 시대입니다. 쌀도 그냥 쌀이 아니라 인삼쌀, 쌀눈쌀, 클로렐라쌀, 현미쑥쌀, 유산균발효쌀, 향기쌀, 우렁이쌀 등등 웰빙시대의 진풍경을 보여주듯 한껏 고급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이팝나무를 보며 하얀 이밥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북한 주민들처럼 아예 먹지 못한 채 굶어죽는 사람도 숱합니다. 한 톨의 쌀, 그것은 생명과 우주의 연대를 상징합니다. 혼자 먹으면 서글퍼지는 밥, 쌀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우주적 연대의 산물이라는 걸 오래오래 곱씹어 봐야겠습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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