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꽃’으로 피지 못한 인생도 향기롭다

  • Array
  • 입력 2011년 2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故이윤기 씨 유고 산문-소설집
◇위대한 침묵, 유리 그림자 이윤기 지음 180, 156쪽·각 1만 원·민음사

지난해 8월 63세로 타계한 소설가 겸 번역가 이윤기 씨는 유고 산문집 ‘위대한 침묵’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가작 입선’이며,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타인에 의해 ‘졸업’으로 바뀌었으며, 미국 연구원 직함도 월급이 없는 ‘초빙 연구원’인 데다 박사란 직함이 붙었지만 사실은 명예박사라는 사실을 담담히 밝힌다. “입선, 중퇴, 초빙, 객원, 명예…. 보라, 한 번도 ‘꽃’으로 피어보지 못한 채 나는 ‘잎’으로만 살았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힘들 내시라. 이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으니.”

정규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독학을 통해 교양과 지식을 쌓았고 15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2000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100만 부 이상 팔리면서 큰 화제가 됐다.

“나는 ‘꽃’보다는 ‘잎’으로 살았다.” 지난해 8월 타계한 소설가 겸 번역가 이윤기 씨는 유고 산문집에서 일생을 이렇게 뒤돌아봤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는 ‘꽃’보다는 ‘잎’으로 살았다.” 지난해 8월 타계한 소설가 겸 번역가 이윤기 씨는 유고 산문집에서 일생을 이렇게 뒤돌아봤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경기 양평군에서 전원생활을 했던 그는 나무를 심고 텃밭에서 고추와 땅콩을 키우며 살았다. 자연이 좋지만 자연을 찬양하진 않는다는 그는 “봄이 되면 산나물 먹는 맛이 그저 그만이고 여름이 오면 내 손으로 가꾼 채소를 거두어 먹는 재미가 쏠쏠할 뿐”이라고 말한다.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에도 고인의 일상이 녹아 있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소녀에게 천사가 와서 내일까지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할까,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할까 고민하던 소녀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소원을 고민하다 보면 자기 현실이 더 불행해지는 것 같으니 소원은 필요 없다고.

“삿된 소원, 삿된 꿈이 우리를 누추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그는 말한다. “빨랫감을 물에 담그기 전에 내 바지의 주머니를 뒤지면서 어머니는 그랬다. ‘나는 네 바지 주머니 뒤질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복권 같은 것이 툭 튀어나올까 봐.’” 묵묵히 걸어왔던 저자의 일생은 로또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랬기에 독자에게 향기 나는 글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