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기원전 통찰서 인류 미래를 성찰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2월 18일 03시 00분


◇축의 시대 카렌 암스트롱 지음·정영목 옮김·740쪽·3만2000원·교양인

사진 제공 교양인
사진 제공 교양인
이 책은 가톨릭 여성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이 야스퍼스 역사 철학의 핵심개념인 차축(車軸)시대를 바탕으로 종교 탄생의 실상과 의미, 그 내용을 탐구했다. 저자는 이미 ‘신의 역사’를 비롯해 수녀였다가 여성 종교학자로 삶을 바꾼 이야기를 담은 ‘마음의 진보’란 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평화의 도구여야 할 종교가 교리 지상주의(근본주의)를 앞세워 갈등과 폭력의 산실이 된 것을 우려하며 저자는 종교 탄생의 순간, 곧 축의 시대(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로 눈길을 돌려 종교 본연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했다. 차축시대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당면 난제와 인류 미래에 대한 답을 그곳에서 찾겠다는 의도다. 여기에는 이후 3000년이 지났으나 인류가 차축시대의 통찰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는 저자의 확신이 있다.

야스퍼스가 그랬듯 저자 역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사유의 창조적 혁명, 종교적 에토스의 출현을 인류 역사의 기축(基軸) 혹은 차축으로 여겼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역사의 정점으로 삼는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과 맥락을 달리한다. 예수도 공자, 석가와 더불어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정조를 선사한 위대한 인물 중 하나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로 인해 스위스 바젤대에서 벌어진 두 ‘카를(Karl)’들, 곧 카를 야스퍼스와 당대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 간 신학논쟁은 대단했다. 야스퍼스는 기독교 중심의 계시신앙을 종교적 파시즘으로 규정했고 바르트는 이런 야스퍼스를 영지주의자로 몰아세웠다. 저자 역시 이런 논쟁사를 모를 리 없을 터지만 야스퍼스의 논지를 종교 갈등이 심화된 오늘의 현실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하지만 그가 야스퍼스를 넘어서는 지점은 축의 시대에 종교적 에토스가 생겨날 수 있었던 사회, 역사적 공통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다.

주지하듯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는 인도를 점령한 아리아인의 거듭된 폭력적 영토정복사의 한가운데서 태동했다. 정복자들이 야기한 폭력적 갈등 상황에서 우주를 자신(아트만) 속에서 보는 자기성찰의 종교가 태동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현실에서 타산지석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기에 국가를 잃고 하느님 법궤마저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들의 경우도 외부의 적을 향한 분노에 앞서 하느님 마음의 회복을 위한 내면의 종교적 영성을 탄생시켰다.

공자의 유교 또한 춘추전국 시대의 무질서한 상황에서 비롯했다. 천명(天命)이 붕괴됨으로써 기존 제의, 예법이 무시되고 폭압적 졸부가 양산되는 현실에서 타인과의 공감적 연대를 뜻하는 인(仁)을 통한 새 질서를 모색한 것이다. 남의 고통과 소통할 수 있는 서(恕)의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인간 누구라도 영적,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영적 평등주의가 유교의 본령이었다.

그리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거듭된 전쟁의 와중에서 인류의 잔혹사가 끝을 모르고 펼쳐졌지만 소크라테스 역시 축의 시대에 걸맞게 인간의 인식을 전환시킨 존재였다. 삶을 거듭 반성하고 질문하되 항시 알 수 없음(無知)을 인정함으로써 평화를 삶으로 살아냈던 까닭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비극을 사랑한 것도 상호 다른 사람들 간의 유대와 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도 일리가 없지 않다.

이렇듯 종교가 고난과 역경, 전쟁과 폭력, 즉 한계상황 한가운데서 창발되었다면 종교로 야기된 오늘의 갈등과 증오, 불관용의 해결 역시 축의 시대의 종교적 통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선 축의 시대 종교가 인간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인간 내면성에 대한 종교적 성찰이다. 그것이 초월이든 자연이든 간에 인간 밖으로 향했던 종교가 인간 내면성에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향한 제의, 예배보다는 자기 속의 신에 대한 자각이 절실했다.

이를 근거로 차축시대 종교들은 회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과 삶의 고통에 진실되게 직면할 것을 주문했다. 삶 자체가 고난인 까닭에 자기 고통에 충실할 때 이웃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다는 새로운 종교성이 자신 속의 신의 발견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축의 시대 종교가들은 내면적 성찰에 근거한 고통의 공감, 곧 공감의 영성을 말했고 이를 위해 종교의 본질은 자기부정(克己)에 있었다. 자신을 비워야 탄식하는 이웃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세상도 달리 만들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소리를 토한 것도 자기부정의 결과였으며 이는 공자의 인(仁)이나 삶을 정화시키는 희랍적 비극의 힘 그리고 탐진치(貪嗔癡)의 불꽃을 소멸시킨 니르바나의 실상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종교 창시자들은 세상의 고통에 맘껏 공감할 수 있었던 위대한 인격들로서 우리를 그 길로 부르는 구원자가 되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 니르바나의 길에 이른 붓다,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이룬 공자는 폭력이 아닌 고통에의 공감을 통해 새 길을 연 존재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종교는 왜 이런가. 교리적 틀 속에 갇혀 개벽(開闢)의 실상을 보이지 못하며 탐진치의 독에 빠져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렸고 우월다툼의 올무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종교는 차축시대의 종교일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종교로 인해 세상이 위험해진 시대에 축의 시대의 종교적 비전, 곧 고통을 공감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를 넘는 초월의 길인 것을 새삼 각인시킨다. 이제 이 책을 접한 독자라면 종교마저도 초월하는 방식으로 자신 속의 탐욕, 이기심, 증오, 폭력을 넘어서야 마땅하다. 사람이 성장하여 ‘사랑’이 되는 방식으로의 자기초월, 이것이 다른 종교를 내 종교처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일 것이다.

이정배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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