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보는데 1930년대 서울(경성)의 지도는 물론 입체적 조감도까지 펼쳐진다. 배우는 제자리걸음을 걷는데 경성시내를 활보하는 듯한 효과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빚어진다. 유성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당시 유행가를 들을 수 있고 당시 인기였던 흑백영화도 볼 수 있다. 대사 가운데 당시 은어나 일본식 표현이 나오면 무대에 설치한 반투명막에 해설문이 비친다.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성기웅 재구성·연출)은 이처럼 소설, 음악, 영화, 나아가 애니메이션, 만화, 다큐멘터리의 기법까지 결합한 ‘하이퍼텍스트 연극’이다. 근대소설가인 구보 박태원의 동명소설을 무대화한 이 작품 속 배우들은 소설을 익숙한 방식으로 연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 문장을 거의 그대로 돌아가며 읊는다.
대화문을 제외하고 그 문장은 모두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해당 장면의 등장인물들이 이를 나눠가며 읊는다. ‘콤마’와 ‘피리어드’까지 섬세하게 살려내며. 그렇다고 낭독공연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연극은 그 주인공을 작가인 태원(이윤재)과 소설 속 그의 분신인 구보(오대석)로 이원화하면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집필된 원작의 묘미를 좀 더 맛깔나게 살려낸다. 또 오버랩과 몽타주 등의 영화적 기법을 소설화한 원작의 실험성을 좀 더 풍성한 미디어와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현대화하고 구체화한다.
연극의 전반부(1막)가 이렇게 소설의 모더니즘 미학을 무대화했다면 후반부(2막)는 구체적 사실과 결합하는 리얼리즘 미학의 유희를 펼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실존모델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면서 소설보다 풍성한 극적 재미를 빚어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비교한 김기림(이화룡)의 평론 내용을 끼워 넣거나 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의 삽화를 그렸던 이상(양동탁)의 소설 ‘날개’의 내용을 삽입하는 식이다.
연극은 그렇게 모더니즘의 미학을 리얼리즘 미학으로 교란하면서 구보 스스로 ‘명랑과 고독의 몽따쥬’라고 명명한 원작 소설의 매력을 120% 이상 살려낸다. 3만 원.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Space111. 02-708-5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서 1930년대 경성 시내를 전차를 타고 가는 소설가 박태원(이윤재)과 소설 속 그의 분신 구보(오대석)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형상화된 모습.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