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바둑 고수가 꼭 인생 고수는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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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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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9단, 자전적 내용 담은 ‘명국선’ 펴내

이세돌 9단(사진)이 15년간의 기사 생활을 정리하는 ‘이세돌 명국선’(3권·파랑새미디어)을 최근 펴냈다. 지난해 하반기 휴직 기간에 누나 이세나 씨와 함께 집필한 이 명국선은 기사 생활에서 결정적 계기가 됐던 9국을 상세히 해설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릴 적 일화, 바둑과 인생에 대한 단상, 그동안 논란이 됐던 사안에 대한 입장도 실어 이 9단의 속내도 엿볼 수 있다. 이를 10문 10답으로 정리했다.

▽바둑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것=포석이다. 허허벌판에 무언가를 채워 나간다는 것이 막막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일단 포석이 끝나면 이후 진행은 덧칠과 같아서 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영역은 중반전이라고 생각한다.

▽기력 향상의 방법=실전을 통한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다. 기보를 놓아 보면서 느끼는 것과 실전을 두면서 느끼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30분 이내의 속기로 두고 끝나면 복기를 해야 한다.

▽바둑 스타일=밋밋하고 안정된 바둑은 내키지 않는다. 보는 이에게 짜릿함과 흥분을 유발할 수 있도록 역동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바둑을 추구한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과 영화, 좋아하는 음식
=‘어린 왕자’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과 생각이 든다. ‘갈매기의 꿈’은 간명하고 친숙하면서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해서 좋았다. 영화는 ‘파이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음식은 쇠고기와 회를 좋아한다. 매운탕 육개장 등 얼큰한 국물도 선호한다.

부족한 점 스스로 아는만큼 애정 갖고 지켜봐줬으면

▽휴직=한국리그 불참에 대한 기사회의 징계 건의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사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고 빠른 시일 내에 모든 것을 잊기는 쉽지 않겠지만 모든 일에는 본인의 책임이 있고 스스로도 일 처리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새삼 가부를 따지고 싶지 않다.

▽대국 중 해프닝=박영훈 9단과의 GS칼텍스배 결승 5국에서 실제로는 두지 않았는데 이미 해두었다고 생각하고 두다가 낭패에 빠져 결국 2연승 후 3연패로 타이틀을 내줬다. 또 초반에 화점을 두려고 하다가 소목을 두거나, 날일자 굳힘을 눈목자 굳힘으로 둔 적도 있는데 이런 실수를 한 경우엔 기분이 나빠져 승률이 50%가 안 된다.

▽역전승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바둑=성적을 내려면 실력 외에 운이 따라줘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2003년 LG배 우승 후 긴 슬럼프에 빠진 뒤 2005년 도요타덴소배 4강에서 쿵제 9단과 만났다. 국면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패색이 짙어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쿵제 9단이 보통 같으면 99% 선수가 되는 곳에 뒀는데 이를 절묘하게 되치기하는 수순이 성립해 대역전으로 이어졌다. 이 바둑을 승리한 뒤 도요타덴소배와 삼성화재배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슬럼프 탈출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판을 졌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밋밋하고 안정된 바둑 싫어, 실전 통한 공부 가장 효과적

▽승부를 앞둔 마음가짐
=흔히 큰 승부를 앞두고 부담 없이 편하게 임하라고 하지만 약간의 부담감과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칠 때가 더 좋은 성적을 낸다.

▽바둑판 사인=바둑판에 사인하는 것에 유독 까다롭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종이나 부채에 사인하는 것과 달리 바둑판은 바둑인에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진정과 정성을 담으려고 한다. 적어도 사인한 바둑판이 누구에게 가는지는 알고 싶다. 가끔 아무런 언급 없이 다짜고짜 바둑판을 들이밀며 사인을 요구하는 것은 사인에 담긴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아 언짢은 면이 있다.

▽바둑과 인생=바둑을 흔히 인생에 비유하지만 어릴 적부터 바둑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 프로기사들은 인생이나 세상살이에 문외한인 경우가 더 많다. 바둑의 고수가 반드시 인생의 고수는 아니다. 기사들도 바둑을 통해 인성을 닦고 성숙함을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력이 강한 만큼 그에 걸맞은 인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은 부담스럽다. 바둑으로는 정상권에 올랐더라도 아직 인생을 사는 데는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만큼 애정으로 지켜봐 줬으면 한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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