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의 향기]‘인간=만물의 영장’ 오랜 믿음에 도전장

동아일보 입력 2010-09-04 03:00수정 2010-09-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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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292쪽·1만6000원/이후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주어진 본성을 초월할 수 있으며 자기 운명과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시대에 상식처럼 퍼져 있다. 그러나 영국의 정치철학자로 런던정경대학(LSE) 교수였던 저자는 인간의 존엄을 최고로 여기는 이러한 휴머니즘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신념’이라며 비판한다.

그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진보나 자아, 자유의지라는 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굳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이나 도덕의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 아니라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족이라고 말한다.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는 ‘약탈하는 자’라는 의미다. 인류를 중심에 놓지 않은 그의 견해는 책의 원제 ‘Straw Dogs(지푸라기 개)’에 더 잘 나타난다. ‘지푸라기 개(추구·芻狗)’는 노자의 도덕경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에서 나왔다. ‘추구’는 고대 중국에서 제물로 만든 개 모형으로 제사 때는 존귀한 대우를 받다가 제의가 끝난 뒤에는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자연은 애증 없이 존재하며 스스로 변화하고 생멸할 뿐이고 인간도 그런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의미다. 저자는 도가 사상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찰스 다윈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종(種)’이란 유전자의 흐름이 만들어낸 경향일 뿐이다. 인류만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존귀한 종이라는 주장은 다윈 진화론과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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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예전의 계시종교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휴머니스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보에 대한 믿음’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인류가 이제까지 존재했던 어떤 세상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신앙에서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유럽인들은 미래도 과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진보의 개념을 버리지 못하는 데는 과학 분야에서 느끼는 체감도 한몫한다. 과학에서 지식의 성장은 누적적이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과 함께 인간 본성이 가진 결점도 확대시킨다. 과학 덕분에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대규모로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지식이 발달해도 우리는 늘 그 상태 그대로 있을 것이고, 모든 종류의 약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특별히 세상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 미래를 구성하며 진보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를 하기 어렵다. 인간의 본질이 그렇다면 인간의 미래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질문에는 ‘인간은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을 때에만 잘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데, 이는 근대 특유의 독특한 생각일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답변에 이어 “인간은 세상은 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삶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다”고 말한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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