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미술 작품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2인극 ‘파이의 시간’. 사진 제공 극단 작은신화
공연 시작 30분 전. 피아노 반주가 흐르는 작은 갤러리를 찾은 관객은 먼저 다양한 미술작품과 만난다. 빨간색 전구 아래 흰 설탕가루가 원형으로 깔린 바닥을 사이에 두고 양쪽 벽에 도시 풍광과 주연 남녀배우를 모델로 찍은 사진작품 20여 점이 걸려 있다. 가운데 벽 앞에 겹겹이 걸쳐진 하늘하늘한 비단 천에는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현대 풍속화가 슬라이드 화면으로 비친다. 30분 뒤 공연이 시작되면 원형의 설탕가루를 무대 삼은 2인극이 펼쳐진다. 영화 ‘연인’ 원작자로 알려진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희곡 ‘라 뮤지카’를 번안한 2인극 ‘파이의 시간’(재구성·연출 신동인)이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지만 지옥과 같은 한철을 보내고 이혼한 부부가 옛 사랑의 둥지에서 재회한다. 둘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비극적 사랑을 회상한다.
남자(장용철)는 “당신이 죽으면 내 고통도 끝날 줄 알았다”며 “난 정확히 겨냥해서 (사실상) 당신을 죽였다”고 고백한다. 여자(박소정)는 “분노가 우릴 살린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는 그전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예요”라고 답한다.
갤러리 벽을 따라 배치된 25석가량의 의자와 그 앞에 방석을 깔고 앉는 보조석까지 60여 석을 채운 관객은 1시간여 분량의 연극을 지켜보며 연극의 주제를 다양한 미술작품으로 형상화한 무대세트 전체를 음미한다.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갤러리에서 공연 중인 ‘파이의 시간’은 이렇게 극장이 아닌 갤러리를 무대로 독특한 예술체험을 안겨준다. 올해 3월 ‘페스티벌 봄’에 초청된 미국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51)의 ‘덧셈에 대한 역원’과 그의 제자인 파브리스 마즐리아와 이오아니스 만다푸니스의 ‘P.A.D’도 아르코미술관을 무대로 삼았다.
공연작품이 이렇게 극장이란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공간으로 침투하는 현상은 세계적 흐름이 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허드슨 강변의 보트 위, 선착장, 주차장, 공원 화장실까지 무대화하는 현상을 소개하며 “무대가 무대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도했다. ‘나이트 라이츠’란 연극은 뉴욕 소호의 주차장에 자동차를 몰고 온 관객들이 차 안에서 무선이어폰을 끼고 지켜보는 가운데 도심 성폭력 사건을 실제상황처럼 재현해 화제가 됐다.
유럽에선 대형 화물트럭의 짐칸에 관객을 태우고 도로를 주행하는 공연까지 등장했다. 다큐멘터리를 연극에 도입한 독일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 ‘카르고 소피아 X’는 무선이어폰을 착용한 45명의 관객을 짐칸에 태우고 2시간 동안 실제 도로를 운행하며 트럭운전사들의 애환을 함께 체험하도록 한 독특한 형식실험으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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