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선우후락
글로벌 경쟁시대에도 필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직장인 프로그램 ‘조용한’ 인기
敬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
지난달 30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종택을 찾은 기업은행 신임 지점장들이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 이근필 씨의 강연을 듣고 있다. 이 씨는 퇴계 철학의 핵심인 경(敬)철학을 들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고 당부했다. 안동=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인 이근필 씨(79)는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꿇어앉은 채 손님들을 맞았다. 선비의 삶을 듣기 위해 찾아온 회사원 33명에게 그는 선조인 퇴계의 행적을 직접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라는 ‘예인조복(譽人造福)’을 안동지역 선행담과 곁들여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퇴계 철학의 핵심인 ‘경(敬)’ 철학을 풀어서 들려준 것이다.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청력이 약해 자신의 마이크 목소리도 듣지 못하는 이 씨가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전날 저녁 정성스레 쓴 ‘敬’자를 선물하면서 한 말이다.
6월 30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을 찾은 기업은행의 신임 지점장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속도가 강조되는 시대에 이들은 안동의 시골로 왔다. 전날 도산서원에서 도포를 입고 퇴계 선생의 위패에 인사를 올리고, 현대사회 엘리트와 선비정신 강연을 듣고, 선비문화에 대한 분임토의를 한 뒤 이날 아침에는 퇴계 선생의 묘소까지 다녀온 길이었다.
2002년부터 주로 학생과 교사를 상대로 선비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해 온 선비문화수련원은 작년에 처음 직장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난해 상반기 421명이던 체험자가 올해에는 1525명으로 늘었다.
이틀간 선비정신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왔다. 김병일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은 선비들의 선우후락(先憂後樂)을 말했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글로벌 시대다. 그런데도 선비정신이 필요한 것은 맛있는 것을 먼저 먹고 좋은 것을 먼저 가지려 하는 인간 본성의 불변 때문이다. 선비들은 궂은일은 먼저하고 좋은 일은 남에게 양보하는 선우후락의 삶을 지향했다.”
퇴계 선생의 묘소가 있는 도산면 하계리에는 마을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하계리에는 국가가 표창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된다. 안동에는 독립운동 훈·포장자가 326명으로 전국 시군 평균의 10배가 넘는다. 또 멀지 않은 곳에는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선생의 문학관이 있다. 선우후락 정신이나 그 실천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비들이 없었다면 의병 기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비정신과 독립운동 전적이 무관치 않은 대목이다. 퇴계 선생의 종택은 독립운동 모의장소로 쓰인다며 두 번이나 불에 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분임토의 시간은 직장 내 조직문화 개선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부모님께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안부를 여쭙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 부하 직원의 가족들에게까지 마음을 써야겠다는 다짐들이 쏟아졌다. 기업은행의 유동순 씨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생활 속에 주변에 소홀했던 자신을 발견했다”며 “회사일을 하면서도 주위를 배려하며 함께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기업이 중요시하는 경쟁과 효율이 선비정신과 상충되지는 않을까. 선비문화 체험행사를 기획한 기업은행 인력개발부 이병직 차장은 “구성원 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나 도리를 딱딱한 강연만으로 교육하는 것보다 선비정신을 통해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며 “최근 기업에서 윤리경영이나 정도경영을 중시하면서 선인들의 올곧은 삶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비문화수련원은 7, 8명의 자원봉사자가 행사를 진행하면서 실비만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만만치 않은 일정의 원활한 진행을 도우며 선우후락의 삶을 실천하는 듯했다.
김 이사장은 “자신의 몸이 불편해도 방문하는 손님을 위해 매일 붓글씨를 손수 쓰시는 퇴계 선생의 종손이나 힘든 일정을 돕는 자원봉사자 모두가 퇴계 선생의 경(敬)을 실천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데서 나온다는 말이었다. 체험행사를 마친 기업은행의 황종호 씨 역시 “부하는 물론이고 가족을 대할 때도 존중을 바탕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겼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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