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통치자가 자리에서 물러난 후 마주치는 적나라한 현실을 풍자한 바츨라프 하벨 원작의 연극 ‘리빙(Leaving)’. 극 중 전직
총리 리이게르(오른쪽)가 인터뷰를 빙자해 자신의 추문이나 캐내려는 신문기자를 환대하며 으스대고 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골치 아픈 부산물 중의 하나가 바로 전직 최고통치자다. 임기를 마치고 권좌에서 내려오면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한 손에는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회고록이란 창을 쥐고 왕조시대 ‘상왕(上王)’의 대접을 바라기 십상이다. 게다가 현직 통치자와 정치적 노선이 다를 경우 그 물밑 투쟁은 또 얼마나 치열한가. 우리는 그 최악의 사태로서 전직 대통령의 자살까지 목도하지 않았던가.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리빙(Leaving)’은 바로 이 전직 최고통치자가 직면하게 되는 적나라한 현실을 그린 연극이다. 시인이자 극작가이면서 ‘동유럽의 만델라’로 불리는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2003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오랜 침묵을 깨고 2008년 발표한 희곡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이다.
15년간 총리로 한 나라를 이끌다 퇴임한 빌렘 리이게르(얀 트리스카)는 오랜 세월 자신의 관저로 썼던 벚나무 장원을 후임 정권에 의해 뺏길 위기에 처했다. 한때 그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현 정권에 참여한 클라인(이반 레자치)이 그 배후다. 언론 역시 그의 정치적 업적엔 관심이 없고 치부에만 관심을 쏟는다. 두 딸 중 큰딸은 이 와중에 그의 유산만 노리고 막내딸은 무관심 그 자체다. 15년간 그의 정치적 반려자로 헌신했던 이레나(주자나 슈티비노바)만이 리이게르를 보호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리이게르는 전락을 거듭한다. 그에 대한 전기를 쓰고 싶다는 여학생과 밀애를 펼치다 들통 나고, 총리 재직 시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기록으로 사법기관에 소환돼 말 못할 모멸을 겪는다. 급기야는 자신의 보좌관의 보좌관이었던 인물의 보좌관을 맡으라는 치욕적 제의까지 받는다. 리이게르는 비겁한 궤변 끝에 이를 수락하지만 결국 장원과 이레나를 모두 잃는다. 바츨라프 하벨 前체코대통령 자신의 생생한 경험 담아 권력무상 신랄하게 풍자
연극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대놓고 차용하면서 권력상실이 한 인간을 얼마만큼 초라하게 만드는지 통렬하게 그려낸다. 하벨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는 리이게르에게 일말의 연민도 베풀지 않는다. 속임수에 빠진 것을 깨달은 리이게르가 비바람 속에서 “우리의 이 모든 세계가 사실은 바보들의 무대”라는 리어의 광기어린 대사를 토해내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질 지경이다. 민주주의 시대의 리어라 할 리이게르는 비극적 광인이 아니라 얼빠진 광대다.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벚꽃동산’의 패러디에서 빛난다. 리이게르의 고매한 신조였던 ‘인간을 위한 정치’와 성장우선, 정부 규제 완화의 논리는 정작 그가 사랑했던 장원을 파괴하고 대형 쇼핑센터를 세우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벚나무를 베어내는 전기톱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리이게르의 장원을 빼앗은 클라인이 리이게르와 닮은꼴 연설을 펼치는 장면은 경제논리 앞에 철저히 무능한 현대 민주주의의 서글픈 초상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하벨의 육성 출연이다. 그는 극 중간 중간 미리 녹음된 목소리로 배우와 연출가, 관객에게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를 늘어놓아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이는 관객과 작가의 직접적 교감을 가능케 해주는 동시에 현실정치인이었던 작가와 그의 분신인 리이게르 사이에 묘한 공명과 충돌을 빚어낸다.
일찍이 칸트는 산(living) 것도 아니고 죽은(dead) 것도 아닌 죽지 않은(undead) 상태에 주목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전직 권력자는 죽지 않은(undead) 정치인이다. 떠나감을 뜻하는 연극의 제목 Leaving은 그렇게 살아있는 권력도 아니고 죽은 권력도 아닌 정치적 상황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작품이 체코 밖에서 공연된 것은 한국이 최초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정치현실에서 음미할 것이 많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공연장을 찾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결코 죽지 않는 정치적 좀비가 될지언정 권불십년의 미래를 준비할 줄은 모르는 정치인만 넘쳐나기 때문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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