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을 만났다, 길은 달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7일 03시 00분


한국적 비디오아트 1세대 작가 박현기 10주기 회고전

박현기 씨의 ‘TV 시소’. 사진 제공 갤러리 현대
박현기 씨의 ‘TV 시소’. 사진 제공 갤러리 현대
긴 철판의 한 끝엔 돌 이미지가 담긴 TV모니터, 다른 끝엔 진짜 돌이 놓여 시소처럼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자연석 사이에 돌을 촬영한 TV모니터를 끼워 넣으니 비디오 돌탑이 탄생한다. 벽면의 스크린에서 쏟아져 내린 폭포의 이미지가 바닥에서 출렁인다.

한국적 비디오 아트의 새 지평을 연 1세대 작가 박현기(1942∼2000)의 작업이다. 영상과 실재가 교묘하게 얽힌 그의 작품은 쉽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1974년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접한 그는 백남준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문법’을 완성한다. 기술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미술의 본질과 자연의 본질에 대한 탐색,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처럼 비디오 아트에 동양적 사유를 접목한 작업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였다.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02-2287-3500)에서 열리는 ‘박현기 10주기 기념 회고전’은 한국 비디오 아트 선구자의 작품 세계를 톺아보는 자리다. 비디오와 설치작품, 미공개작 등 20점을 볼 수 있다. 홍익대 회화과를 다니다 건축과로 옮긴 작가는 졸업 후 고향 대구에서 실내장식회사를 운영하며 작가로 활동했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하며 주목받은 그는 오브제와 비디오 영상을 결합해 실재와 재현, 자연과 인공을 대비하거나 결합하는 작업과 더불어 실험적 퍼포먼스도 펼쳤다. 실제 돌과 돌 이미지가 조화를 이룬 ‘비디오 돌탑’, 모니터가 어항인 양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TV어항’이 평가를 받으면서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도 참가한다.

물성을 비디오로 끌어안은 그는 돌을 즐겨 활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돌이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다. 돌 작업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구과학의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박현기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성좌이자 미완의 과제”라며 “그가 척박한 땅에 쌓아올린 비디오 탑은 오늘 더욱 굳건하고 드높아 보인다”고 평했다. 미술사적 업적에 비해 학문적 평가가 소홀했던 작가를 재조명하는 의미 있는 전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