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김영헌 ‘Electronic Nostalgia’전, 정정주 ‘응시의 도시’전

  • Array
  • 입력 2010년 2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불안도 때론 사유를 증식한다

죽음보다 두려운 정신의 소멸…
멈춰버린 도시 속의 ‘낯선 나’…

가상현실서 만나는 묵직한 성찰

유럽에서 활동하다 9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연 김영헌 씨의 신작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2009년). 미키마우스처럼 어린 시절 꿈의 대상이던 캐릭터가 실상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임을 깨달은 작가는 전자적 색채를 이용해 이를 향수와 비판의 대상으로 표현한다. 사진 제공 성곡미술관
유럽에서 활동하다 9년 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연 김영헌 씨의 신작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2009년). 미키마우스처럼 어린 시절 꿈의 대상이던 캐릭터가 실상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임을 깨달은 작가는 전자적 색채를 이용해 이를 향수와 비판의 대상으로 표현한다. 사진 제공 성곡미술관
아름답고 섬뜩하다. 영상 스크린 속 할아버지가 힘들게 호흡을 불어넣으면 전시공간에 놓인 세 벌의 웨딩드레스는 생명을 얻은 듯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바람은 서서히 빠져나가고 옷들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는다. 화면 속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늘 현재로 돌아와 자신의 딸, 그 딸의 딸을 위한 소망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설치작가 김영헌 씨(47)의 영상설치작품 ‘내 딸의 딸을 위하여’는 기억의 소멸, 존재의 소멸에 대한 불안을 다룬다. 그의 ‘Electronic Nostalgia: Broken Dream’전은 설치와 회화작업을 통해 삶의 불연속성, 생로병사, 매스미디어의 이율배반적 감정을 깊이 파고든다(3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 2관).

친숙하면서 낯설다. 전시장에는 건축물 모형이 모여 있고, 모형 안에 설치된 이동식 카메라가 포착한 풍경은 벽면의 영상과 사진으로 펼쳐진다. 외계인이라도 침입한 것일까. 생명의 흔적이 잡히지 않는 텅 빈 가상도시는 외롭고 기이하게 보인다.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갤러리 조선에서 열리는 설치작가 정정주 씨(40)의 ‘응시의 도시’전이다.

40대 이상 중견 작가들이 젊은 세대에 밀려 상대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 현실. 그 속에서 만난 두 전시는 탄탄한 내공과 깊은 사유를 녹여낸 ‘녹록지 않은 무게감’으로 돋보였다. 각기 설치와 회화, 설치와 사진의 결합을 통해 우리의 감성을 가상현실 속으로 초대하는 전시들이다.

‘응시의 도시’전에서 정정주 씨는 건축물 모형에 LED 조명과 영상을 결합한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유령의 도시 같은 텅 빈 풍경을 통해 ‘마비된 도시’의 긴장과 불안을 파고든다. 사진 제공 갤러리 조선
‘응시의 도시’전에서 정정주 씨는 건축물 모형에 LED 조명과 영상을 결합한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유령의 도시 같은 텅 빈 풍경을 통해 ‘마비된 도시’의 긴장과 불안을 파고든다. 사진 제공 갤러리 조선
○ 소멸하는 존재의 불안

김영헌 씨는 회화를 전공한 뒤 199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설치작품으로 처음 대상을 수상해 주목받았다. 한동안 유럽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9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에서 영상, 설치, 회화를 통해 그가 축적한 역량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육체의 죽음보다 정신의 소멸이 더 두렵다”고 말하는 작가. 그의 작업에는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스며 있다. 벼룩시장에서 산 털코트를 잘라서 완성한 ‘머리 없는 인체’ 드로잉도 그런 작품이다. 털을 제공한 동물도, 외투의 주인도 ‘부재’하는 현실. 시간이 흐르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영상설치작품이 생성과 소멸의 순환, 과거의 시공간이 오늘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보여 준다면 회화는 현대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근작 회화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클라우드 맵’ 연작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한다. 멀리서 보면 전자적 색채감이 현란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분절된 신체의 파편이나 장기가 보인다.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던 미키마우스, 아톰 캐릭터가 문화제국주의와 상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 작가. 그의 마음에는 실망과 그리움이 엇갈리고 자신의 심리적 기형성, 사회가 지닌 정신적 기형성을 낯선 이미지로 표현한다.

가상공간과 가상의 경험이 현실의 경험을 대체하는 세상. 그 양면성을 효과적으로 조율해낸 작업이 우리가 이미 실제와 가상 세계의 향수가 혼재된 세상에 몸담고 있음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2000∼3000원. 02-737-7650

○ 마비된 도시의 불안

빈 건물만 남은 도시의 풍경이 괴괴하다. 정정주 씨가 모형과 영상으로 완성한 공간설치작품엔 광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 기억이 반영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소강상태일 때 책을 사러 시내로 향한 초등학생. 그의 눈에 유리조각이 흩어진 도로와 차들이 멈춘 풍경이 각인된다. 1987년 광주시내가 마비된 현장을 보면서 그는 ‘마비된 도시’란 화두를 떠올린다.

전시장에는 상하이, 나고야, 서울의 건물 모형이 자리한다. 일상 건물이지만 집합한 상태에선 실재감을 잃어버리고 비일상적 분위기를 풍긴다. 건물 안에서 빛이 서치라이트처럼 돌아가면서 빛의 움직임과 영상 속 공간의 움직임이 뒤섞인 작품은 환영(幻影)의 공간에 대한 체험을 유도한다. 02-723-7133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