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27개국 대표작가들이 그린 ‘유럽인의 내면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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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1일 03시 00분



◇유럽, 소설에 빠지다1·2/라르스 바리외 엮음·이현경 외 옮김/각 264, 288쪽·각 1만2000원·민음사


오스트리아 빈의 대형 백화점 야간 경비원. 러시아에서 대학 강사였던 그는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뒤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 강사보다 이 일을 하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주차장을 관리하거나 폐쇄회로(CC)TV를 통해 매장과 물품하치장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터키, 세르비아 등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그의 직장 동료다. 그는 “실패한 인생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국제 노동자 동맹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한다.

러시아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가 블라디미르 니키포로프의 ‘어느 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서유럽으로 이주한 러시아 지식인의 일상을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 작품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서구문명에 대한 이질감, 경계인으로서의 번민 등을 섬세하게 형상화했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현대인들의 고립감과 상실감은 만국 공통어인 것일까. ‘유럽, 소설에 빠지다’는 이처럼 유럽 현대 도시인들의 다채로운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주한 외교대사들의 친목모임 ‘서울문학회’ 회장인 라르스 바리외 주한 스웨덴 대사가 기획한 이 책은 ‘도시’를 테마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회원국 27개국 대표 작가들의 단편을 수록했다. 프랑스의 안나 가발다, 독일의 잉고 슐체, 영국의 제이디 스미스 등 국내에 책이 출간된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들이다.

역사·문화적 맥락은 다양하지만 작품 속 도시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크게 낯설지 않다. ‘프랑스어 수업’은 불가리아 작가 니콜라이 스토야노프의 작품으로 빈부의 갈등을 다룬다. 도시의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는 소년은 작은 오두막집에 ‘지식층’이란 글자를 새겨 넣을 만큼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님 덕에 프랑스어 사교육을 받게 된다. 전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프랑스 문화원에서 그는 “불가리아 민족은 단순하고 근면하다”, “체르벤코프 동무는 불가리아 민족의 지도자이다”등의 문장들을 배운다. 체르벤코프는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총리를 지냈던 정치인으로, ‘작은 스탈린’으로 불렸던 스탈린주의자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이반 마르코프는 엄청나게 값비싼 필기구들과 장난감을 가진 부자 친구다. 침실, 서재까지 있는 이반의 집에 놀러 간 뒤 주인공은 처음으로 “아빠는 나에게 아무것도 사 줄 수 없잖아요!”라고 부모에게 반항한다. 비교와 열등감, 세계에 대한 인식을 최초로 일깨운 이 사건 이후 주인공은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좀 더 분명해졌다”고 말한다.

그리스 작가 마로 밤부나키의 ‘전화 한통의 단막극’은 현대인의 고립감을 그려낸 작품. 퇴근 뒤 연인과 통화하는 여주인공은 때론 상대에 집착하고 때론 상대에 신경질을 퍼붓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증스러운 쓸쓸함과 싸우기 위한” 여자의 독백이었음이 밝혀진다. 독일 통일 직전 여권을 위조해 유럽을 여행하게 된 한 동독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잉고 슐체의 ‘제우스’ 등도 수록됐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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