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90>‘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21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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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신 회장(가운데)이 1983년 12월 미국 폰즈사와의 기술제휴로 생산된 폰즈 제품 발매 기념식에서 김정례 보건사회부 장관(오른쪽) 등 참석 귀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가운데)이 1983년 12월 미국 폰즈사와의 기술제휴로 생산된 폰즈 제품 발매 기념식에서 김정례 보건사회부 장관(오른쪽) 등 참석 귀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13>다국적 기업과의 결별
2년 법적공방 끝 합작 청산
지분 완전인수해 홀로서기 나서
원칙 강조해 ‘터프 우먼’ 별명

세계 최대 다국적 생활용품 기업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었다. 영국 대기업에 한국 토종기업을 빼앗기느냐, 한국 기업이 승리하느냐의 싸움에서 우리는 차근차근 법리 공방을 해나갔다. 이런 싸움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도 옳고 그른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길게만 느껴졌던 이 싸움은 1992년 마침내 애경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상표 전쟁으로 시작된 전쟁은 50 대 50으로 시작한 합작회사를 애경만의 독자 회사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합작 계약 당시 주식을 팔 때는 합작 상대방에게 우선권이 부여된다는 조항에 따라 애경은 합작 상대 기업의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이로써 애경은 홀로서기에 나섰다.

합작 초기 상대 회사가 합작 회사 이름에 두 회사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도록 하자는 것을 끝내 ‘애경산업’으로 고집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럽다. 그러지 않았으면 회사 이름을 몇 년 만에 바꾸는 등 애경에 좋지 않은 과거를 남길 뻔했다.

그럼에도 애경산업 합작사와의 결별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애경에 분명히 큰 시련이었다. 미국 폰즈사와 합작해 1985년 설립한 ‘애경폰즈’ 역시 폰즈사가 우리와 합작이 결렬된 상대 기업에 흡수되는 바람에 자동으로 해체되고 화장품만 몇 년 동안 생산하다 사업을 중단했다.

이에 앞서 애경유지는 당시 정부의 화장품 수입 전면 자유화 시책에 대응하기 위해 화장품 업계 진출을 결정하고, 1983년부터 폰즈사와 화장품 제조 관련 기술제휴 계약을 맺어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방문판매 유통이 대부분이던 당시 화장품 판매 방식과 달리 슈퍼마켓이나 약국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했다.

애경폰즈는 또 당시 화장품 업계에서 드물게 수출 시장을 열었다. 설립 첫해인 1985년 말레이시아 BHD사에 바세린 베이비 젤리 1만3000개를 수출해 동남아 지역을 공략했다. 화장품 수출 공로로 1986년 보건사회부에서 화장품 수출유공업체 표창도 받았다.

애경폰즈는 애경산업과 합작사의 결별 이후 애경산업에 합병됐고, 순수 우리 제품인 애경 포인트(POINT)로 화장품 생산을 이어 나갔다. 애경 포인트는 초창기에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콘셉트를 내세워 지금도 ‘클렌징의 대명사’로 소비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처럼 합작과 결별 과정은 애경에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실리도 적지 않았다. 상대 합작회사가 워낙 규모가 큰 세계적인 기업이었던 만큼 기술은 물론이고 마케팅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들에게 배운 마케팅과 홍보 전략, 완벽을 추구하는 품질 전략, 소비자 접근 방법 등은 회사의 발전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 합작 기간에 그들의 전략을 마냥 따라하기보다는 제품과 전략을 한국 시장에 적합하도록 적응 및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애경과 합작이나 기술제휴를 했던 외국 기업 사이에서 나는 ‘터프우먼’이나 ‘어글리 마담 장’으로 통했다. 여사장의 부드러움을 기대했던 그들은 오히려 남자 기업인보다 더 원리 원칙을 주장하고 최대한 우리나라에 유리한 조건만을 뽑아드는 나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합작 초기의 일이다. 한번은 기념식을 치르는데 합작 상대 회사가 기념식장에 태극기를 달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준비 과정 도중 전달해 왔다. 나로서는 한국에 설립한 회사에 한국 국기를 달면 안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측은 한국 회사가 아니라 합작 회사임을 강조했다.

이에 발끈한 나는 더 큰 태극기를 식장 한가운데 단 뒤 애국가 제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전부 다 해버렸다.

‘로마에서는 로마식으로’ ‘한국에서는 한국식으로’ 하자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어이가 없었던지 그들은 나에게 ‘마담 장 터프우먼’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줄다리기와 같다. 받아들이되 한국을 꼭 쥐고 좋은 점만 취하는 게 중요하다. 자기 주체성 없이 무턱대고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자신 만의 확고한 주체의식을 단단히 세워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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