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고종 독살 음모엔 커피와 여인이?

입력 2009-07-04 02:52수정 2009-09-22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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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김탁환 지음/254쪽·1만 원·살림

1898년 ‘김홍륙 사건’ 바탕 상상력 동원한 소설
두 사기꾼 연인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 흥미
러시아 - 한국 넘나들며 꼬리무는 반전 눈길

‘노서아 가비(露西亞 加比)’가 뭘까. 마치 암호나 외국어처럼 생경하게 느껴지는 이 단어는 사실 ‘러시아 커피’를 음역(한자로 외국어의 음을 나타냄)한 말이다. 커피가 ‘가비차’ ‘양탕국’ 등으로 불리던 개화기 조선 시대, 이 ‘노서아 가비’의 맛과 향을 음미하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흘려보낸 한 여인이 있다. 소설의 첫 장을 빌리자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 버리는 여자’다.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에게 직접 끓인 커피를 올렸으니 조선인 최초의 바리스타라고 할 법도 하고 러시아 ‘뻬쩨르부르그(페테르부르크)’와 한양을 가진 것 없이 말발 하나로 주름잡았으니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할 법도 한데….

김탁환 작가가 펴낸 신작 장편 ‘노서아 가비’는 1898년 역관 김홍륙 등이 모의했던 고종의 독살 음모 사건을 토대로 상상력을 풀어낸 작품이다. 작가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여주인공 ‘따냐’를 창조해냈다. 그녀가 처음 러시아 커피를 마신 곳은 압록강 위에서였고, 제대로 된 맛을 본 것은 뻬쩨르부르그에서였다.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누리던 따냐가 혈혈단신 압록강을 건너 러시아까지 가게 된 것은 역관이었던 아버지가 천자의 하사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죽게 됐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온 따냐는 본인도 미처 알지 못했던 순발력과 뛰어난 화술, 처세술을 발휘해 탁월한 사기꾼이 된다. 처음에는 즐비한 카페에 가서 허황된 모험담(자신이 페르시아 왕국은 물론이고 식인종이 산다는 아프리카 남단까지 다녀온 용감무쌍한 대여행가였다는 이야기 등)을 늘어놓는 정도였으나 점차 대담해진다. 그림 위조 사기꾼과 동업해 가짜 그림을 팔아 치우고, 얼음여우라는 조직에 가입해 유럽 귀족들에게 러시아 숲을 파는 사기를 치기도 한다. 잠시 임차한 숲의 주인 행세를 하며 서류를 꾸며 돈을 가로챈다. 이 과정에서 역시 피치 못할 이유로 고국을 떠난 이반이란 조선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반은 얼음여우와 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숲 판매 사기단의 조직원. 따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릴 때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들은 연인이 된다. 이반이라는 남자야말로 누구든 속여 먹을 수 있는 천부적인 사기꾼 기질을 타고난 자다. 물론 사기꾼이란 점 외에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고,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새로운 조직을 꾸려 종횡무진 사기를 치고 다니던 그들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를 접견하러 온 조선의 사신 민영환의 환심을 산 뒤 신분을 감춘 채 조선으로 되돌아온다. 좀 더 거대한 ‘마지막 한 건’을 위해서.

배경은 러시아 대륙에서 1896년 아관파천 당시 조선의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온다.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커피를 처음 접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함께 커피를 즐겨 마신다. 권력이 친러 세력에 집중됐던 때여서 러시아어에 능통한 이반은 김종식이란 가명을 쓰며 역관으로 세도를 부리고, 따냐는 고종에게 커피를 끓여 시중드는 일을 맡는다. 매일 왕을 접견하면서 말동무가 된 따냐는 을미사변 이후 슬픔에 잠긴 채 쓴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종에게 인간적인 측은함을 느낀다. 한편 과거의 미심쩍은 행적이 연이어 드러나는 이반에 대해서는 의심과 불안감을 느낀다. 천하의 사기꾼인 이반이 노리는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고종의 독살 음모 사건에 연루돼 각자의 운명을 떠안게 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험과 반전이 숨 가쁘게 전개된다.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함과 위악, 낭만이 뒤섞인 여주인공 따냐와 끝내 진심을 파악할 수 없는 이반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흥미를 더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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