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32>경제외교-고배를 마시기도

  • 입력 2009년 5월 7일 02시 57분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주프랑스대사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한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왼쪽).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주프랑스대사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한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왼쪽).
원전 건설자금 조달 美-獨서 고배

佛서 장기차관 약속 종잣돈 마련

재처리 연구시설은 美반대로 무산

전회에서 본 바와 같이 나는 1976년 5월 외자도입을 위해 외국 순방길에 올랐고 첫 번째 목적지인 미국 워싱턴으로 갔다. 먼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윌리엄 케이시 미국 수출입은행장을 찾아갔다. 케이시 씨는 후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수장이 된 사람이다. 이 은행은 이미 웨스팅하우스사의 원자력 발전기 2기 구입자금을 융자한 바 있었는데 나는 추가 자금이 필요했다. 그에게 방문 목적을 말했더니 국별 한도가 차서 더는 지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안해하며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오찬을 같이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됐다. 첫째는 미국 의회에서 수출입은행이 미국 대기업의 물건을 팔아주기 위해 정부 돈으로 개발도상국에 저리융자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수출입은행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한국의 인권문제가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전부터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던 그였던 만큼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독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여기에도 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날 저녁, 내가 투숙한 호텔에서 큰 리셉션이 열리고 있었다. 독일이 브라질에 원자력발전기 8기를 공급하는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축하하는 리셉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 경제부 장관을 만났을 때, 당분간 생산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다음 날 마지막 목적지인 파리로 갔다. 먼저 레몽 바르 총리를 찾아가서 면담했는데 그의 답변은 최소한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힘을 얻어 관계장관과 협의한 끝에 프라마톰 원자력 발전기 건설회사와 2기 구매를 위한 장기차관 공여에 합의하게 됐다. 이것이 후일 경북 울진군에 건설한 1, 2호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시발(始發)이다. 이에 앞서 1974년 과학기술처는 별도로 프랑스 프라마톰사와 교섭해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얻어 핵연료 재처리에 관한 연구시설을 우리에게 팔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고, 이는 상기 원전(原電)을 구매하는 부대조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가 이것을 알고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핵 확산방지를 위해 핵연료 재처리는 국제적 관리하에 두어야 하고 개별적 국가가 아니라 지역단위의 국제적 재처리공장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일개 연구 시설에 불과하니 이해하라고 촉구했으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한국이 연구시설을 이용해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만들면 그로부터 플루토늄을 추출해 원자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 계약을 취소하라고 강력히 압력을 가하고 있어 나는 후일 바르 총리를 다시 만났을 때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국 한-프랑스 양국 정부는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 의회가 미국 수출입은행의 저리대출에 대해 찬성으로 선회하자 슈나이더 주한 미 대사는 나에게 와서 프랑스의 원전 대신 미국 것을 살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이 못한다 해서 프랑스로 간 것이니 도의적으로 프라마톰의 원전을 살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후일 미국 국무부에 들렀을 때 필립 하비브 차관보(전 주한 미 대사)가 서울의 주한 미 대사에게서 보고를 받았다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다 서로 웃고 말았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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