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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2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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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낯설고 당혹스럽다. 이 시집에는 때와 공간, 막(幕)이 있으며 지면이란 무대도 있다. 등장인물은 ‘미지의 혀’라고 한다. 기묘하고 기형적인 속성을 가진 시의 언어들이 시인 김경주(32·사진)를 만나 한 편의 언어극 ‘기담’(문학과지성사)으로 재탄생했다. 언어실험적인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1만 권 이상 팔리며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아온 그의 두 번째 시집이다.》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카페 이마에서 만난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무엇을 쓸 것인지 뚜렷한 지향을 구축해야 했기에 독자들의 기대를 한 번 더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종시집’ 탄생의 변을 말했다.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된 연극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의 극작가나 이효석 문학축제 등 행사 연출가로 문화 전방위에서 활동 중인 그의 신작 시집은 부조리극 형식을 표방하며 첫 시집보다 더 실험적이고 난해해졌다. 시집에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폐 엑스레이 사진, 악보 등 다양한 이미지를 수록했고 본문 배치에도 변형을 뒀다. 그는 “첫 시집이 잘됐다고 내 시가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번 시집은 참혹하게 망가질 것까지 감수한 모험이다. 실험적인 것을 넘어 오히려 더 읽히지 않고, 불친절하게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찾아가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 “언어극 형식… 이야기 아닌 언어 자체에 돌진”
그가 택한 여정의 극점에는 언어가 놓여 있다. 그는 “드라마 왕국인 한국 사회에서는 이야기(플롯)가 있는 ‘화제’가 중요할 뿐 ‘문제’ 그 자체는 무시된다. 사람들은 가십이 넘치는 어지러운 세계를 울렁증과 멀미로 견디고 있다”며 어떤 우회나 미화 없이 ‘언어’라는 문제로 거침없이 돌진한다.
시집은 각각 ‘인형의 미로’ ‘인어의 멀미’ ‘활공하는 구멍’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됐다. 각 막 안에 실린 시들은 때로 극의 특정한 상황이기도 하며, 누군가의 대사이기도 하다. 새로운 막이 오를 때마다 언어는 ‘미로와 멀미 속에서 활공’하며 언어가 구현할 수 있는 궁극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무지개를 찾아오는 기이한 성인식을 치르다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처럼 (‘연출의 변’) 이것은 결코 잡을 수 없는 허상을 좇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내내 이 착오를 완성하고 그 미개로 죽겠다’(‘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는 결의를 버리지 않는다. 비감마저 느껴지는 이 결연한 다짐이야말로 “끝까지 언어예술가로 남고 싶다”는 이 젊은 시인의 출사표다.
○ “시집을 1차 텍스트 삼아 무대에도 올릴 계획”
시를 바탕으로 공연이나 전시를 기획하거나 희곡 대사에서 시를 뽑아내는 장르 전이작업을 해온 그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이번 작품을 1차 텍스트로 삼아 무대에도 올릴 계획이다. 시와 극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상황, 영화, 드라마, 심지어 기사를 보고도 사람들은 종종 ‘시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시적이란 게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죠. 시의 속성에 주목한다면 그 형식이 반드시 시일 필요도 없으며 독자들에게 억지로 시집을 읽게 할 것도 없습니다. 연극, 뮤지컬, 음악을 통해서라도 시적 느낌을 복원한다면 대중은 결코 시로부터 절연할 수 없으니까요.”
“시는 전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이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경주야말로 문단의 이종(異種)인 셈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물소리가 허공에 쌓이고 있다
공기가 물의 체내에 쌓인다
그늘이 허공을 벌리고 흘러내린다
언어가 성대를 꺼내놓는다
천천히 지면을 걸어다니는 언어
언어가 허공에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한다
다시 입을 벌리며
인어(人語)와 언어(言魚)
사이에 지느러미가 있다
―김경주 시집 ‘기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