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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9월 12일 02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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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침략 옹호했다는 기술은 명백한 왜곡
한일 강제합방 - 3·1운동땐 일제 폭압 비판
“19세기 말 미국에서 조선 땅에 들어온 개신교 복음주의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이었다. 복음주의가 공격적이며 신앙을 강요한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정·교 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개신교는 당시 제국주의에 부역하지도 않았다.”(박명수 서울 신학대 대학원장)
개신교계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신교와 관련한 오해와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겠다고 나선다. 교회사를 전공한 전국 신학대 교수와 학자 5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사학회는 근현대사 속의 개신교 기술을 바로잡기 위해 18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세미나를 연다.
이번 세미나에서 박명수 서울신학대 대학원장은 ‘한국 개신교는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침략을 옹호했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개신교가 일제를 옹호했다는 비난을 반박한다.
박 원장은 미리 배부한 논문에서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사례를 들어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한일 강제합방(1910년 경술국치) 이전’ 시기 개신교에 대한 기술이 왜곡돼 있다고 반박했다.
박 원장은 해당 교과서에서 “(당시) 서양 종교의 이념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도 했다”라고 기술한 대목이 개신교를 지칭한 것인데, 이는 사실 관계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이 대목에 대해 미국에서 들어온 개신교의 복음주의는 신앙의 자유를 중시했기 때문에 공격적 선교와는 거리가 있었고 미국의 제국주의 확장 과정에서 선교가 이뤄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박 원장은 “미국은 중국, 러시아, 일본과 달리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망이 없었으며 선교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에게 조선 국내법의 테두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프랑스가 조불조약(1886년)을 통해 조선에서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획득했을 때도 미국은 조미조약(1882년)의 최혜국 조항에 따라 같은 권리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조선이 선교의 자유를 허락할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또 박 원장은 개신교가 일제 침략을 옹호했다는 주장에 대해 ‘춘생문 사건’ 등을 들어 반박했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요청을 받은 미국공사 존 실이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1859∼1916)와 아펜젤러(1858∼1902) 등과 함께 고종을 경복궁 춘생문을 통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했을 만큼 개신교가 조선에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내용과 별도로 개신교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과 다른 주장을 폈다.
그는 선교사들이 일제강점기 기독교인의 무장독립운동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 “그들의 일관된 원칙은 폭력에 대한 반대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말에는 무장독립운동을 자제시켰고 한일 강제합방과 3·1운동 때는 일제의 폭압에 반대했다”며 “미국과 선교사들이 한국의 독립을 기대했던 만큼 지원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통째로 일제 침략을 옹호했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친일파 송병준이 1909년 초 일본에 건너가서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그 본질이 애매한 약 35만 명의 기독교도 일단이며 그들의 배후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있다”며 개신교를 ‘일본통치’에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이 세미나를 기획한 한국교회사학회장 김홍기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일부에서는 개신교가 제국주의 앞잡이 노릇까지 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그릇된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박 원장의 논문은 학회의 공식적인 의견이며 일부 교과서의 잘못된 기술을 바로잡고 나아가 이런 내용들을 국민에게 알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