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투명… 진솔… 임동혁표 ‘바흐’

  • 입력 2008년 6월 20일 03시 01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출시

1977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저 먼 우주를 향해 탐사선을 발사했다. 이 때 혹 있을지도 모르는 우주인에게 지구인의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금박을 입힌 레코드에 바흐의 음악을 새겨 전파를 발산하게 했다. 지금도 영원의 우주 공간에 퍼지고 있을 지구인의 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바흐의 음악이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함께 음악의 아버지 ‘대(大) 바흐’의 걸작 중의 걸작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연주자에게 있어서 반드시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다. ‘아리아’에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거쳐 다시 ‘아리아’로 종결하는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구도는 바흐가 믿었던 루터파 개신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에 근원한다.

숫자 ‘3’이 그것인데, 3의 배수마다 1도씩 상승하는 ‘카논(canon)’을 배치한 완벽한 구성은 어떠한 수학공식보다 더 논리적이다. 이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무한하고 불교의 윤회(輪廻)설과도 일치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 삶의 여정과도 같다.

바흐가 가르치던 클라비어 연주자 골드베르크가 자신이 섬기던 백작의 불면증 치료를 위해 의뢰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원래 2단 건반의 쳄발로를 위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88개의 건반을 가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할 때 엄청난 기술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20세기 전기 녹음이 시작된 이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은 클라비코드, 쳄발로, 피아노 등 각양각색의 악기 연주로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의 규범적인 쳄발로 연주는 바흐 본연의 명연이었다.

글렌 굴드의 혁명적인 주법에서부터 로절린 투렉의 ‘바흐 신전의 여사제(女司祭)’적인 면모,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티끌 하나 끼어들 여지가 없는 간명한 타건에 이르기까지 현대 피아노로 탈바꿈한 ‘골드베르크’는 많은 바흐 추종자를 열락(悅樂)의 샘으로 몰아넣었다.

우리 음악계는 어떨까. 1999년부터 3년을 묵묵히 바흐의 ‘시냇물’을 그 근원에서부터 타고 내려온 연주자, 강충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리고 2008년 강충모를 잇는 약관의 한국인 청년이 다시 한 번 ‘골드베르크’로 도전장을 던졌다.

30년 만의 혹한이 몰아쳤던 2002년 1월 10일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앞에서 두꺼운 오버코트와 머플러로 온 몸을 감싼 앳된 얼굴의 17세 소년 임동혁을 만났다. 그와 함께 고골리, 체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찾았다. 임동혁은 그 가운데 기적처럼 찾아낸 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타티아나 니콜라예바(1924∼1993). 그녀는 평생을 바흐 연주에 바친 러시아의 최고 여류 피아니스트다. 임동혁은 니콜라예바의 묘지에서 추위도 잊은 채 경건하게 서 있었다.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3대 콩쿠르를 석권하고 쇼팽과 같은 낭만파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임동혁이 마침내 바흐를 들고 나타났다.

올해 2월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들었던 임동혁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이제 천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거장으로 도약하는 그의 진솔한 삶의 고백이었다. 투렉을 연상케 하는 느린 템포의 첫 곡 ‘아리아’에서부터 때로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 니콜라예바의 인간미와 소박함까지, 임동혁은 그만의 바흐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었다.

최근 나온 임동혁의 바흐 음반(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EMI)은 무엇보다 투명하고 솔직하다. 제4변주에서 뛰어노는 천진난만함은 제16변주의 ‘프랑스풍의 서곡’에서 천근의 무게를 싣고 요동한다.

마지막 ‘아리아’는 더없이 느리게 갈무리된다. 임동혁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서 라틴어 경구가 떠올려졌다.

“기억하라 인간들아,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poetandlove@artg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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