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 10년, 영화는 감상하는 것? 영화도 쇼핑하는 것!

  • 입력 2008년 4월 8일 02시 53분


■ 복합상영관이 바꾼 영화계 풍경

《극장이 영화를 바꿨다. 멀티플렉스 10년.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서울 광진구 강변CGV는 1998년 4월 4일 첫 관객을 맞았다. 쾌적한 로비에서 11개 상영관에 걸린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매력이 호응을 얻었다. CGV의 성공에 롯데시네마 일산관(1999년)과 메가박스 코엑스점(2000년)이 뒤를 이었다. 멀티플렉스(Multiplex·복합상영관)는 통상 6개 이상의 상영관을 갖추고 쇼핑, 외식, 게임 등 놀이 공간을 함께 갖춰 한곳에서 영화 관람과 식사,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을 가리킨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인한 극장 공간의 변화는 영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문화 활동의 의미와 산업 구도를 변화시켰다.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은 영화를 ‘쇼핑’하는 ‘소비자’가 됐다. 배급과 제작을 일원화한 자본이 주도하는 영화 시장의 변화도 멀티플렉스 등장 이후 형성됐다.》

○ 도시민의 놀이터가 된 영화관

“현대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쇼핑센터로 변신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콜하스가 일찌감치 지적했듯 멀티플렉스 역시 도시 전체의 상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형 쇼핑센터의 한 ‘코너’가 된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은 이제 영화를 ‘감상’하기보다는 ‘소비’한다.

1998년 9만1500명당 한 개꼴이던 스크린은 이제 2만3500명당 한 개꼴이 됐다. 그만큼 일상에서 쉽게 접하게 됐다는 얘기다. 단관 극장 시절에는 관객들이 특정한 영화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 외출했지만 요즘 관객들은 나들이 또는 쇼핑 시간을 알차게 채워줄 ‘영화 상품’을 수많은 영화가 상영되는 멀티플렉스라는 ‘진열대’에서 골라잡는다. 이 같은 영화의 ‘소비 성향’은 제작되는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평론가 황영미 씨는 “2000년대 이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 영화가 많이 제작된 것은 멀티플렉스에 ‘놀러 온’ 사람들에게는 무겁고 골치 아픈 예술영화나 정치영화보다 잘 팔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기간에 관객 몰이… 투자 활성화 큰몫”

“‘괴물’이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멀티플렉스가 만든 영화다.”

심재명 MK픽처스 대표는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수백억 원대의 투자 유치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한 영화가 많게는 500∼600개의 스크린 확보가 가능해지면서 단기간에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게 되자 영화산업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심 대표는 “예전처럼 100만 관객을 모으는 데 6개월 정도 걸렸다면 100억 원 이상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멀티플렉스는 영화 시장의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 멀티플렉스의 성장에 힘입어 1998년 5018만여 명이던 연 관객 수는 1억5879만 명으로 증가했다.

영화평론가 정지욱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가 급속히 성장한 데는 멀티플렉스의 관객 동원력이 큰 역할을 했다. 1000만 관객은 멀티플렉스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 벤허 같은 와이드스크린 영화 자리 잃어

멀티플렉스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다. 오락성 짙은 상업영화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멀티플렉스 스크린의 대부분을 잠식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나 예술적 주제를 다룬 영화를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는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상영관은 늘어났지만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한 개의 상영관에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시간대에만 상영하는 등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적다”고 말했다.

영화감독 배창호 씨도 “멀티플렉스는 다양한 영화 콘텐츠 생산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고 말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멀티플렉스 사이에서 ‘작은 영화’를 배려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CGV는 지난해 멀티플렉스 내에 예술영화 전용관인 ‘무비꼴라쥬’를 만들었다. 현재 전국에 있는 ‘무비꼴라쥬’는 7곳. 메가박스도 ‘유럽영화제’ 등을 기획해 상업성에 좌우되지 않는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영화 마니아들은 상영 공간이 좁은 멀티플렉스 때문에 웅장한 스펙터클을 맛보게 해 준 70mm 필름 영화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한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멀티플렉스에서는 대형 화면에서 70mm 대작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작품을 볼 때 느꼈던 경이로움이 없다”고 말했다.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등 폭 70mm 필름을 사용한 와이드스크린 영화는 일반 영화보다 좌우가 30% 정도 길어 웅장한 경관을 사실적으로 전달하지만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사이즈로는 그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한국 멀티플렉스 시장을 주도하는 ‘빅3’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이들은 각각 차별화된 공간 구성으로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원조 멀티플렉스인 CGV가 표방하는 것은 ‘씨네 뮤지엄’. 영화관을 단순히 영화를 보고 가는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취지. 대표적인 곳은 서울 압구정CGV 신관. 건물에 들어서면 로비 공간에 스파이더맨, 다스베이더 등 영화 속 인기 캐릭터들이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다른 한편에는 옛 영사기, 카메라, 필름통 등 영화 장비 20여 점과 인기 배우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상규 CGV 홍보팀장은 “지금은 전시품이 많지 않지만 앞으로 점차 늘려 나갈 예정”이라며 “최근 건립된 부산 대연점, 강원 춘천점도 ‘씨네 뮤지엄’을 만들었고 앞으로 새로 설립되는 CGV마다 이런 공간을 꾸밀 예정”이라고 말했다.

메가박스는 ‘매스티지’ 전략을 내세웠다. ‘매스티지(Masstige)’는 ‘대중(Mass)을 위한 명품(Prestige)’이라는 의미. 메가박스는 매스티지 전략에 따라 모든 지점에 일반 상영관과 똑같은 가격으로 좀 더 좋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M관’을 만들었다. M관은 스크린이 다른 곳보다 사이즈가 크고, 양쪽 팔걸이 의자 등 시설을 고급화했다. 또 메가박스 목동관의 경우 영화 상영시간까지 무료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상영관 하나를 ‘플레이스테이션존’으로 꾸몄다.

3사 중 유일하게 한국 자본만으로 건립된 멀티플렉스인 롯데시네마는 ‘토종’ 이미지를 앞세웠다. 롯데시네마 건대입구관은 내부 벽면과 바닥을 훈민정음 하회탈 십장생 등의 무늬로 꾸몄다. VIP라운지 역시 창호지가 발라진 전통 창문 형식으로 만들었다. 홍대입구관은 젊음을 상징하는 ‘비보이’의 모습을 벽화처럼 그려 넣었다. 임성규 롯데시네마 홍보팀 과장은 “국내 자본으로 시작됐음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시네마는 모기업인 롯데백화점 내에 입점해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지난해부터 가족 관객을 유치하기 위한 ‘CF관(Couple&Family)’을 새로 만들었다. CF관은 온가족이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도록 4인용 좌석으로 꾸며진 게 특징이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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