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맛있는 사랑요리 즐겨볼까, 서글픈 이별밥상 차려볼까

  • 입력 2008년 3월 22일 03시 00분


◇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박주영 지음/280쪽·1만 원·문학동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최고이고, 콘서트는 댄스그룹이 나오는 게 좋고, 연주회는 거의 다 졸리다. 평범한 대한민국 20대 후반의 취향을 지닌 여자 나영. 몇 번 연애해 봤고, 남자친구가 있고, 요리 관련 자격증이 있어서 용돈 정도는 벌 수 있고, 슬슬 결혼 생각도 해줘야 한다. 남자친구 성우가 딱히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아닌데, 그렇다고 성우와 헤어지는 건 잘 상상이 안 간다. 어쩐다?

2006년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인 ‘백수생활백서’가 문단 안팎의 조명을 받으면서 박주영(37) 씨는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박 씨의 두 번째 장편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는 제목에 주제가 함축된 작품.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는 건 요리해 먹기 위해서다. 이 소설은 먹을거리의 레시피(요리법)처럼 ‘연애의 레시피’를 탐색한다.

문제는 좀 애매한 관계의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친구 유리의 남자친구 지훈. 지훈은 나영과 초등학교 동창이고, 나영이 초등학교 때 살짝 좋아했던 이성이며, 지금은 유리랑 나영이랑 셋이서도 종종 만나는 사이다. 나영은 지훈이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우는 지훈의 존재를 늘 신경 쓴다. “이 음식점 지훈이랑 와본 덴데”라는 나영의 한마디에 옥신각신하다가 성우는 급기야 연락을 뚝 끊어버렸다. 어쩌면 좋으냐?

연애 초짜도 아니니, 이 시점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경험의 레시피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면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다. 연애만 할 때야 쿨하게 시작해서 쿨하게 끝낼 수도 있겠지만 결혼 생각을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성우가 너무너무 좋은 건 아니더라도, 남편감으론 딱일지도 모르는데.

‘연애’가 제목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해 이별 소설이다. 작가는 이야기 초반에 나영과 성우를 확 갈라놓고, 이후 나영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준다. 성우랑 사귈 땐 살찔까 봐 못 먹었던 프라이드치킨을 팍팍 먹어준다. “정말 성우랑 끝난 거니?”라며 물어오는 친구들과 만나서 위로를 받는다. 언니 소개로 ‘모범 식단’과 ‘퓨전 요리’ 같은 남자를 차례로 만나준다. 명백히 이별 뒤의 수습 요리법.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맛을 보고 간을 맞추는 그 시점에, 상만 차려서 내면 되는 바로 그때, 나는 다 된 요리를 망쳐버린 건 아니었을까. 혼자 끓어서 넘치도록 멍하니 있었거나, 다 끓지도 않았는데 속은 안 익고 겉만 익었는데 성급히 불에서 내려놓은 건 아니었을까.” 작가는 나영이 느끼는 슬픔 아닌 당혹감을, ‘뜻대로 안 되는 사람 마음’을, 맛깔스럽게 풀어간다.

나영과 성우 말고도 나영 친구 은주와 석호, 유리와 지훈 등 많은 커플이 나와 연애하고 헤어지지만, ‘키스 장면 하나 없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지루하진 않다. 대한민국 여성 누구나 겪었을 법하고 고민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편안하게 풀어간다.

이별 뒤 방황의 모습을 딱하게 여기기보다 찬찬히 공감하는 심정이 되는 건 나영이라는 캐릭터의 느긋한 성품에 힘입은 바 크다. 꽃미남 지훈이 그저 그런 외모에 통통한 나영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판타지 같다는 독자의 항의도 있을 법하다. 그렇지만 그 전에 보여준, 이별에 대처하는 나영의 성숙하고도 겸허한 자세를 따라 읽으면 이 주인공이 꽤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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