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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22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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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용광로에서 녹여낸다.
20세기 들어서 국가 간의 이동에는 총칼이나 종교보다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예술단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거장 지휘자 로린 마젤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이
26일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다.
뉴욕필의 평양 공연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참석한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대거 취재에 참가하고, 미국과 프랑스 한국은 물론 북한 전역에 생중계된다고 하니 단순한 오케스트라 공연이 아니다. 혹자는 미국이 보내는 ‘트로이 목마’로, 한쪽에선 김정일 위원장의 북한체제 선전용 ‘꼭두각시놀음’이라며 정치적인 해석이 팽팽하다.
뉴욕필은 이번 공연에서 조지 거슈인의 ‘파리의 미국인’, 안톤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신세계로부터’,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뉴욕필이 연주하는 이 프로그램들은 ‘방황하는 미국인’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 주는 선곡이다.
“파리를 방문한 미국인이 거리를 지나면서 자동차 경적 등 갖가지 소음에 귀 기울이면서, 조금이라도 더 프랑스의 모습을 느끼고 싶어 하는 인상을 그리려 했습니다.”
뮤지컬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던 거슈인은 클래식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1928년 30세에 처음으로 파리에 갔다. 이때 작곡한 ‘파리의 미국인’은 샹젤리제의 큰 길을 활보하는 시골뜨기 미국인의 모습을 보는 듯 흥겹다. 진 켈리 주연의 뮤지컬 영화 ‘파리의 아메리카인’의 마지막 17분에서는 아무런 대사 없이 거슈인의 동명의 관현악곡에 맞춰 남녀 주인공이 화려한 댄스를 춘다. 대도시의 소란스러움을 흥겨운 클래식 스윙 선율로 표현한 이 곡에 평양시민들도 엉덩이를 들썩이게 될지 모르겠다.
‘파리의 미국인’이 미국 작곡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파리를 본 음악적 기행문이라면, ‘신세계로부터’는 체코의 국민음악가였던 드보르자크가 당시 ‘신세계’였던 미국 대륙에 대한 감흥을 그린 곡이다. 드보르자크는 1892년부터 1895년까지 3년 동안 미국 뉴욕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돼 뉴욕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뉴욕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심한 향수에 빠져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아이오와 주 스필빌 등 보헤미안 이주민들이 사는 촌락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그곳에서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의 민요를 연구해 ‘신세계에서’라는 자신의 최초이자 마지막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교향곡 ‘신세계에서’ 중 가장 사랑받는 부분은 제2악장 라르고이다. 잉글리시 호른에 의해 연주되는 따뜻한 선율은 꿈에 그리는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거슈인의 ‘파리의 미국인’에서도 2부에는 바이올린 선율이 블루스 풍으로 애잔하게 연주되는 것을 보면, 방황하는 유랑민들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뉴욕필의 선곡 중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이다. 장대한 금관군이 폭발하는 ‘환희의 동기’로 시작되는 이 곡은 누구나 한 번 들으면 깊은 인상에 젖을 만큼 다이내믹한 곡이다. 이 전주곡에 바로 이어지는 곡은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혼례의 합창’이다. 일각에서는 ‘로엔그린’이 미국과 북한의 행복한 ‘결혼’을 바라기 위한 곡이라는 섣부른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오페라 ‘로엔그린’은 비극이다. 성배(聖杯)의 기사 ‘로엔그린’과 결혼한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는 결혼식날 금단의 질문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결국 로엔그린은 백조를 타고 성배가 있는 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뉴욕필의 평양공연이 북핵 문제 등 정치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주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케스트라가 금단의 영역을 해결할 순 없다. 다만 파리 대신 평양의 대로를 걸으면서 미국인들은 어떤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인지. 주체사상탑이 높이 솟아 있는 평양에 사는 시민들도 자유분방한 뉴욕필의 선율을 들으면서 ‘신세계’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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