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3>김종삼 전집

  • 입력 2007년 9월 2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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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풍경 소리가/툭 툭 끊어지고/있었다/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다름 아닌 人間(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桶(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머나먼 廣野(광야)의 한복판 얕은/하늘 밑으로 ―‘물桶(통)’에서》

청춘 시절엔 연애도 예쁜 옷도 여행도 관심 없었다. 다만 너무나 시인이 되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우곤 했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는지 몰라 무턱대고 시를 외웠다. 외우기 쉬운 짧은 시가 좋았다. 묘사와 상징을 알고부터,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길고 가느다란 자코메티의 작품을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부턴 짧고 간결한 시에 더욱 끌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같은 김종삼의 ‘묵화(墨畵)’를 읽다가 자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로 낭송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정작 시인이 되는 길은 까마득해 보였다. 시인은 아무나 되나? 공책을 새로 사곤 끼적거리던 시 대신 소설 비슷한 것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읽어 왔던 시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이야기’가 있는 글들을.

이미지의 눈부신 소묘를 보여 준 ‘북치는 소년’은 김종삼 시인의 대표작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소년들은 혼자이며 소외돼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고독을 고독이라고,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날 시인은 판잣집 안에 어린 코끼리가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걸 본다. 자세히 보니 코끼리가 아니라 15년 전에 죽은 동생이다. 그래서 시인은 ‘더 자라고 둬 두자’ 하면서 ‘뭐 먹을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현실을 환상과 병치시킨 시다.

현실과 환상의 병치는 슬픔을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예술적 방법이다. 그의 시는 이처럼 환상의 아름다움과 비세속적인 순수에서 출발한다. 평론가들이 그의 시를 두고 정의한 ‘비극적 세계관’은 긍정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열망은 고독한 사람, 기댈 곳 없는 사람일수록 더 강렬하게 느낀다. 말러와 드뷔시의 음악을 좋아했고 커피와 술을 좋아한 가난한 김 시인이 오후가 되면 나타나곤 했던 광화문 거리를 30년 후 할 일 없이 나, 어슬렁거리다가 그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피곤한 나는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시큰둥하게 생각한다. ‘어제의 나를 만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고 ‘연인이 생겼으나 잘 만나주지 않고’ 그러니 ‘살아갈 앞날을 탓하면서 한잔 해야겠다’라고. 그러자 그의 또 다른 시가 이렇게 속삭인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 어느 때의 시는 아무 때나 기대서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크고 넓은 가슴 같다. 노랫말처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네’ 혼자 흥얼흥얼거리는 사이에 집에 다 왔다. 그런데 누가 나한테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나. 아무래도 그건 술 한잔하면서 곰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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