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천재론]<20·끝>15세 마술사 정동길 군

  • 입력 2007년 7월 28일 03시 03분


코멘트
“꼭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어요. 헤어 나올 수 없었으니까요.”(정동길 군)

5년 전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마술사가 빨대를 가지고 마술을 선보였다. 그걸 본 소년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술의 비밀을 꼭 풀어야 했다. 한순간도 손에서 빨대를 놓지 않고 연구한 끝에 비밀을 알아냈다.

그렇게 터득한 마술로 슈퍼집 둘째아들은 가게를 찾은 손님들에게 마술쇼를 펼쳤다. 반응이 좋자 “마술 하나 보여 드릴까요”라며 아무에게나 무작정 접근했다. 패스트푸드점을 습격했고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때가 겨우 열 살이었다.

그 후 제대로 마술을 하겠다며 홀로 강릉에서 상경했다. 연고도 없는 서울 바닥에서 합숙 하며 5년 동안 2500여 회 공연을 치렀다. 드디어 그는 올 6월 2일, 고향인 강릉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마술쇼를 열게 된다. 15세 소년 마술사 정동길(상인천중 3년) 군이다.


▲ 촬영 : 박영대 기자

○ 타고난 무대 체질에 뭐든지 끝까지

20일 경기 부천시에 있는 마술 연습실에서 만난 정 군은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수줍음 많고 앳돼 보이는 전형적인 중학생이었다.

하지만 정 군에게 마술을 지도했던 ‘매지션’ 최석훈 대표(24)는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잠도 많고 만날 멍하게 앉아 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신기해요. 무대에만 올라가면 180도 변해요. 1시간 내내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평소 어수룩해 보이고 비둘기나 테이블 같은 중요한 마술소품을 깜빡하기도 하지만, 무대에만 오르면 정 군은 프로로 돌변한다.

어머니 안정희(40) 씨 얘기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수학이나 과학경시대회에 나가면 상을 꼬박꼬박 타왔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말해요. 학교에서는 잘 못하는데 상을 타오는 걸 보면 희한한 애 같다고.”

이런 일도 있었다.

“용돈을 안 줬는데 매일 군것질을 하는 거예요. 돈을 훔쳤나 의심했어요. 알고 보니 우리 가게에 온 손님들에게 팁을 받은 거였더라고요. 나 몰래 손님들 앞에서 즉석 마술쇼를 보여 준 거죠.”

그 이후 정 군의 부모는 용돈 한번 주지 않았다고 한다. 마술과 관련된 어떠한 간섭도 그때부터 끊었다.

실전에 강한 ‘무대체질’일 뿐 아니라 집착과 오기도 지독하다. 축구경기를 해도 짜증날 정도로 상대 선수를 수비하는 편. 눈여겨본 마술은 끝까지 그 기술을 알아내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알아내지 못해서 해 뜰 때까지 밤을 새운 적도 많다.

정 군의 전매특허인 ‘레인메이커’는 바로 그런 끈기의 산물이다.

‘레인메이커’는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 제프 맥브라이드의 마술. 두 개의 그릇에 담긴 물을 마술사가 계속해서 마셔도 화수분처럼 물이 나오게 한다. 마임과 마술이 결합한 고난도의 퍼포먼스다. 음악에 맞춰 동작을 표현해야 해 뛰어난 순발력과 연기력을 필요로 한다.

국내에서는 오직 정 군만이 할 수 있다. 베테랑 마술사들도 마술의 비밀이 무엇인지 정 군에게 물어 올 정도. 매일 제프 맥브라이드의 마술쇼 동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비밀을 파헤친 결과였다.

○ 간단한 마술로도 관객 홀리는 연기력

현재 정 군이 할 줄 아는 마술은 1000가지가 넘는다. 마술 소품도 웬만하면 직접 만든다. 하지만 다른 마술사에 비해 기술적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다. 남들이 한 번 연습해서 터득하는 기술을 정 군은 세 번 네 번 반복해야 한다.

오히려 정 군의 특기는 무대에서의 쇼맨십이다. 자신이 아는 기술을 표정이나 연기를 통해 현란하게 연출해 낸다. 리듬과 박자를 타야 하는 비트박스(손과 입을 사용해 강한 리듬을 만드는 것)도 수준급.

최 대표도 “어려운 스킬에 목을 매는 마술사들이 있어요. 고난도의 마술을 보여 주는 게 마술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결국 자신이 아는 기술을 나열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러나 동길이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요. 그 대신 간단한 마술로도 무대와 관객을 장악할 줄 알죠”라고 한다.

원래 마술쇼에서는 나오지 않는 ‘앙코르’라는 말이 정 군의 공연에서는 터져 나오는 이유다. 작년 국제마술대회(SAM) JAPAN 컨벤션에서 우수연기상을 받았을 때도 ‘피플 초이스’라는, 관객의 반응을 평가하는 항목에서 유독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루 일과를 엿보니 학교 가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마술 연습이다. 마술을 시작한 후 5년 동안 주로 인천 지역 내 장애인 시설을 돌아다니며 마술공연을 했다. 이제 지역 내 웬만한 봉사기관은 다 돌았을 정도. 지방으로 순회공연이라도 할 때는 새벽녘에 귀가하는 게 다반사다. 혹시 정 군에게 고비는 없었을까.

작년 한 차례 방황이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이 힘들었다. 같이 마술을 하던 또래들도 한때의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마술을 접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 군은 금세 털고 일어나 마술에 몰두했다. 이제 정 군의 부모가 그만 접고 강릉으로 내려오라고 하면 “이제는 5년이라는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단다.

이은결, 루를 비롯해 국내 유명 마술사들이 대중에게 인정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보통 7, 8년. 어린 나이에 마술을 시작해 이제 5년차인 정 군도 예전에는 ‘제2의 이은결’이 되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 군은 “이제 좀 다른 꿈을 꾸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무대에서 ‘정동길 쇼’를 여는 것. 그래서 요즘엔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며 영어로만 하는 마술쇼를 준비하고 있다.

“마술은 행복을 주는 거짓말이래요. 단순한 눈속임이 아닌 관객을 행복하게 홀리는 마술이죠. 이제까지 관객들에게 마술을 걸었다면, 이번엔 세상에 마술을 걸어 보고 싶어요. 라스베이거스의 ‘정동길 쇼’도 곧 이뤄지겠죠?”

글=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

동길이는

△생년월일 1992년 4월 21일 △가족관계 아버지 정성훈, 어머니 안정희 씨 슬하의 2남 중 막내 △혈액형 A형 △취미 비트박스, 음악감상 △출신교 강릉 옥천초교-상인천중 △존경하는 마술사 제프 맥브라이드 △입상 경력 SAM JAPAN 컨벤션 우수연기상, 하이 서울 매직 페스티벌 도전 마술사 1위(2006년) △출연 경력 청소년 문화축제 밥 콘서트 공연(2004년),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 기금 마련 엘리스 매직콘서트 게스트 공연, 강릉 시민을 위한 정동길의 매직콘서트(2007년)

■ 잠재능력검사 해 보니…

다중지능(MI)이론에 기초한 잠재능력진단검사 결과 정동길 군은 8개 지능 중 논리수학적성과 공간적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논리수학적성은 숫자를 능숙하게 다루고 논리적인 추론으로 규칙이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인과관계에 맞춰 다양한 마술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내는 마술쇼엔 이러한 능력이 필요하다.

정 군이 좋아하는 과목도 과학과 수학이다. 어렵지 않으냐고 묻자 “마술과 비슷한 점이 많다”며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실험이나 복잡한 산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 군은 또 신체운동성향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적성과 달리 신체운동성향은 능력과 관계없이 마음속에서 반응하는 경향을 말한다. 정 군의 신체운동적성은 낮은 편. 하지만 적성에 비해 성향은 유달리 높게 나왔다.

대교심리진단센터의 김영선 연구원은 “운동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자기가 신체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해내고 그것을 잘 해내겠다는 의지가 강할 때 이런 경향을 보인다”며 “정군은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정 군이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또래들에 비해 진로에 대한 확신성과 준비성 등이 높은 수치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혼자 1시간 반 동안 쇼를 이끌어 가는 것 역시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도 관객의 눈을 끊임없이 속여야 하는 마술쇼라면…. 국내 유일의 마술학과인 동아인재대 마술학과 강형동 교수는 “16세라는 나이에 1시간 반 동안 자신만의 쇼를 꾸릴 수 있는 건 프로도 보통 프로가 아니다”며 “그만큼 다양한 기술을 구사할 줄 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