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일확천금에 삶을 걸다…‘럭키경성’

  • 입력 2007년 7월 2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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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경성/전봉관 지음/344쪽·1만2000원·살림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민족의 운명은 암흑이었지만 조선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땅 투기와 주식, 쌀 투기도 성행했다. 투기를 위해 정어리를 매점매석하는 ‘사업’도 있었다. 이 사실만으로 보면 조선은 근대 자본주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여느 지역과 별다를 바 없었다.

이 책은 20세기 초 조선에서 다양한 형태로 돈을 추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조선 최초 부동산 신화의 주인공 김기덕, 사회주의 공동체를 꿈꾼 자본가 이종만, 주식시장에서 횡재의 꿈을 불사른 김기진, 영어 실력 하나로 벼락 출세한 이하영 등이 주인공이다.

김기진은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등 사회주의 문학 단체를 주도했던 문인. 그러나 그는 호구지책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낮에는 주식중매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간신문을 편집하는 ‘이중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금광 등 큰 사업도 해봤지만 주식 매매는 오직 총명한 판단으로 짧은 시일 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 적어 놓기도 했다. 금광 사업을 할 때는 낮에는 광원들과 어울려 금을 찾고, 밤에는 동아일보에 소설 ‘청년 김옥균’을 연재하기도 했다.

김기덕은 인구가 100여 명에 불과하던 함경북도 나진 일대 땅에 투자해 수백 배 차익을 얻은 거부. 그는 나진이 일본과 대륙을 연계하는 항구로 선정될 것을 예상해 땅을 사들였고 1932년 8월 총독부가 그의 예상대로 발표하면서 거부가 됐다. 유력 후보지로 거론됐던 인구 4만 명의 청진에서는 땅값이 폭락해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김기덕은 이후 공익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남북 분단으로 만주와 함경북도 일대의 사업체와 부동산을 두고 월남해 ‘보통 부자’로 살았다.

이종만은 금광을 판 돈 중 3분의 1을 농촌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며 소작농을 위해 내놓았다. 그로 인해 ‘공부(公富·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부자)’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1937년 9월 17일자 사설에서 “이런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157만 평에 불과해 수혜 소작인이 153호에 그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사업체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배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1949년 6월 그는 김일성이 소집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남한 대표로 참가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로 통한다.

구한말 미국 공사와 외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의 이야기는 외교에 어두웠던 조선에서 영어의 위력을 보여 주는 사례다. 찹쌀떡 행상을 했던 이하영은 알렌 박사를 우연히 만나 요리사가 되면서 영어를 배웠다. 더듬거리는 영어였지만 당시로선 조선 최고 수준. 이하영은 알렌 박사가 고종을 진료할 때 통역사로 따라갔다가 벼슬을 얻었고 미국 공사로 가게 됐다. 워싱턴 사교계에서도 그는 빼어난 술과 춤 실력으로 ‘상투 댄디’로 통했다.

저자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의 책을 통해 근대 조선의 사회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1920∼30년대 투기 바람은 권력으로 철저히 소외당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돈을 향한 열망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자본주의의 돈맛을 본 첫 세대였다”고 발문에서 밝혔다.

허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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