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석탑 금제품은 백제인의 걸작”

  • 입력 2007년 7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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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전북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408호) 5층 석탑(국보 289호) 지붕돌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다. 화려한 무늬의 금사리함, ‘금강경’을 얇은 금판에 새긴 금강경판, 아름다운 색과 균형미를 갖춘 유리사리병. 이들 사리장엄구는 나중에 국보 123호로 지정됐다. 이 걸작에 대해 통일신라의 유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 금-수은 2 대 8비율… “통일신라 유물” 견해 반박

그러나 최근 금사리함 연꽃무늬가 사비시대 다른 유물의 무늬와 비슷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새로운 주장이 맞는다면, 이 유물은 국내 최고(最古)이자 백제 유일의 사리장엄구가 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 무왕(7세기 초) 때 궁궐인 왕궁리유적의 대규모 공방유적에서 나온 200여 개 도가니와 다량 출토된 금제품의 성분과 제작 기법을 분석한 결과 최고 기술을 가진 백제 장인집단이 이 사리장엄구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아 주목된다.

특히 왕궁리 공방 유적에서 나온 금아말감과 금은아말감 덩어리를 중요한 증거로 꼽았다. 아말감은 수은과의 합금으로 도금에 사용되는데 석탑에서 나온 유물들이 모두 도금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립전주박물관은 순금제로 알려졌던 사리함이 동판에 도금한 것이며, 금강경판은 은판에 도금한 유물이란 것을 밝혀낸 바 있다. 이 밖에 사리장엄구에 쓰였을 제작기법의 흔적이 백제 공방 유적에서 다수 발견됐다.

당시 백제의 장인들은 제련·정련뿐 아니라 금으로 가는 실을 만들 만큼 고도의 세공 기술을 보유했다. 사리장엄구는 이 같은 기술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공방 유적과 사리장엄구가 말해 주는 당시 탁월한 세공 기술을 들여다봤다.

▽다양한 합금=순금뿐 아니라 합금도 만들었다. 유적에서 나온 도가니와 제품에 따라 금에 섞인 은의 함량이 달랐다. 은이 많을수록 단단해진다. 무늬를 새긴 연꽃구슬에는 은의 함량이 적었으나 금못엔 은의 함량이 10∼15%였다. 도가니를 숯불에 올려놓고 풀무질로 양질의 순금을 정련하는 것도 고도의 기술인데, 장인들은 구리 주석 납의 함량을 조절해 순동 청동 황동까지 따로 만들어냈다.

○ 0.15mm 두께 금강경판 0.25mm 금실로 엮어

▽정교한 아말감=금과 수은을 2 대 8의 비율로 섞은 아말감을 금속에 바르고 불가마니로 쬐였다. 수은은 증발하고 금만 금속 표면에 강하게 달라붙었다. 공방의 아말감 덩어리에 있는 금과 수은의 비율은 늘 한결같았다. 정확한 함량의 아말감 기술이 정착됐다는 증거다. 이 탁월한 도금법 덕분에 사리장엄구는 1400여 년간 눈부신 금빛을 지킬 수 있었다.

▽얇은 금판=탁월한 세선세사(細線細絲)법을 구사해 0.15mm보다 얇은 금판과 금실을 만들어냈다. 금강경판의 금판 두께는 0.15mm에 불과하다. 망치로 수없이 두드려 ‘금종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금판을 연결한 금실의 직경은 0.25mm. 공방에서도 0.3mm가량의 금실이 많이 나왔다. 금실은 금판을 오려 양끝을 잡고 꼬아 만들거나 단단한 판의 구멍에 금을 통과시키는 인발법(引拔法)으로 만들었다.

▽금실 무늬=직경 0.3mm의 금실에 돋을새김으로 무늬를 새길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세공술이 발달했다. 사리함의 연꽃무늬에도 이런 세공술이 이용됐을 것이다. 금꽃구슬 표면에는 반질반질하게 광택을 낸 흔적이 뚜렷하다. 정밀하게 연꽃 모양을 잘라낸 흔적도 있다. 이 기술은 사리함 뚜껑의 연꽃무늬 모양 꼭지를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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