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미소 변함없건만 장안寺는 흔적만…

  • 입력 2007년 6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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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불교계 인사들 분단후 첫 내금강 불교사찰 순례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22일 내금강 장안사 터를 찾은 비구니 혜해(86) 스님이 감회에 젖은 듯 나직한 목소리로 ‘황성옛터’를 불렀다. 외금강 신계사에서 출가한 지 60여 년 만이다. 폐허가 된 개성 만월대를 찾은 느낌을 표현한 노랫말이 6·25전쟁으로 터만 남은 장안사의 쓸쓸함과 어우러졌다.》

○ 전쟁으로 거대사찰 주춧돌-사리탑뿐

551년 창건된 장안사는 6전(殿) 7각(閣) 2루(樓) 2문(門)에 10여 채의 요사채를 자랑하던 거대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주춧돌과 17세기 양식의 사리탑만 남았다. 조선 중기 화가 이정(1578∼1607)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린 벽화도, ‘일도산문만사휴(一到山門萬事休·한번 산문에 이르면 만사가 그친다)’는 글씨로 참배객을 맞이하던 일주문도 사라졌다.

분단 60여 년 만에 성지순례를 위해 21∼23일 내금강을 찾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과 불교계 인사 160여 명의 감회도 혜해 스님과 같았을 것이다. 내금강은 금강산 4대 사찰 중 신계사를 제외한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를 품은 불교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장안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 표훈사다. 이곳은 많은 전각이 전쟁의 참화를 피했다. 반야보전의 하늘로 날아갈 듯 웅장한 공포가 눈길을 잡아끈다. 최근 이곳을 찾은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영기문(靈氣文·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여러 문양)을 그대로 건축에 옮겨놓은 듯하다”고 평했고, 조계종에서 파견돼 신계사 복원에 힘써 온 제정 스님은 “도편수의 기예가 살아 있는 걸작”이라고 말했다.

반야보전 앞의 7층 석탑은 기단이 없어 초라했다. 표훈사 진각 스님은 “본래는 53불을 형상화한, 670년경 세운 9층 동탑(銅塔)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다”고 전했다.

○ 표훈사 반야보전 고구려풍 문양 눈길

유생들이 절경에 취해 바위마다 어지러이 이름을 새긴 만폭동 계곡과 53칸짜리 거대 선방이었지만 전쟁으로 사라진 마하연선원 터를 지나자 국내 최대의 마애불 묘길상(높이 15m)이 위용을 드러냈다. 고려 말 선종의 대가인 나옹화상이 조각했다는 이 마애불은 미술사가들이 고려 불상의 최고 명작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는 수작이다. 실제로 보니 미소가 기품 있으면서도 그윽하다. 묘길상은 문수보살이란 뜻이지만 실제론 아미타불이다.

표훈사 아래엔 서산대사비 등 10개의 비석, 사리탑이 있는 백화암 터가 있다. 17, 18세기 양식의 비석들에서 정교한 품격이 느껴진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이리 많은 탑과 비석을 모신 것은 임진왜란에서 거둔 서산대사의 공덕을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서산대사비의 받침돌인 비희(몸은 거북이고 머리는 용) 머리 부분 왼쪽이 깨져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복원사업이 한창인 신계사 앞에는 고승 나운(懶雲·1709∼1782) 대사의 행적비가 받침돌이 사라진 채 쓰러져 있다. 사찰 밑 개울의 다리 상판으로 쓰이던 것을 가져 왔다고 한다. 지금도 전쟁으로 파괴된 소중한 불교 문화재들이 어디선가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10월 13일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한 신계사의 낙성식이 열린다. 내금강의 불교 문화재들도 제 모습으로 복원될 날이 올까. 제정 스님은 “장안사는 일제강점기에 치밀하게 그려진 실측 도면이 있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종훈 스님은 “장안사 터 등의 주춧돌을 제자리에 놓고 묘길상 앞 석등과 서산대사비 등 훼손된 유물의 보수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내금강=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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