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0년 고대생들 깡패들에게 피습

  • 입력 2007년 4월 18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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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은 베이컨의 이른바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혜’로써 진지하게 학문하여 성실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고대신문, 1960년 4월 2일자 사설)

1960년 4월 1일 개학을 맞아 고려대 교정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마산시위 사건에 대해 토론회가 연일 이어졌다. 그러잖아도 “서울 학생들은 비겁하다”는 말이 나오던 차였다. 거사일은 4월 18일로 잡혔다. 교정 곳곳엔 ‘급고! 12시 50분 전원 본관 앞에 집합할 사(事)’라는 격문이 붙었다.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한 3000여 명의 학생은 교문 밖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달려갔다. 거리에서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과 합류한 시위대는 국회 앞까지 진출했다.

해질 무렵까지 시위를 마치고 경찰의 인도 아래 귀교하던 학생들은 종로4가에서 뜻밖의 사태를 맞이했다.

천일극장 옆 골목에서 100여 명의 깡패가 쇠망치, 도끼자루, 쇠파이프, 벽돌, 갈고리 등의 흉기를 들고 학생들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틈도 없던 학생들은 실신한 채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길바닥에 흩어진 핏자국과 주인을 잃은 책가방, 구두, 손수건…. 다음 날 동아일보엔 ‘현장에 경관 100여 명이 있었건만/깡패 한 명도 미체포’란 기사가 실렸다.

이어 ‘피의 화요일’이었던 4월 19일. 고려대생이 깡패에게 피습을 당했다는 소식에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고교생과 시민이 가세한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고, 정부의 발포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태는 4월 26일 오전 10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막을 내렸다.

5·16군사정변 후 ‘고려대생 습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정치깡패 이정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0년 5월 3일자 ‘고대신문’엔 조지훈의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가 실렸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아/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늬들 마음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을 피리라.”

전승훈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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