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세계
서울 강남의 도로 한복판. 빨간불에 대기 중인 강인구(송강호)는 깜빡 잠이 든다. 옆 운전자의 눈흘김을 느낀 뒤에야 깨어나는 이 남자, 으리으리한 차에는 흠집도 나 있다. 고단한 일상 속에서 삶은 더 괴롭다. 아파트 시공업체 사장을 쪼아 계약을 했지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는 도망치고 일은 꼬인다. 그런 그는 혀를 차며 외친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눈부신 칼로 1초 만에 사람을 죽이는 조폭은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검은 정장을 입었을 때는 봐줄 만했다. 러닝셔츠, 팬티 차림의 강인구는 어깨가 늘어진 나약한 40대 ‘펭귄’이다. “당신 이제 싸움도 못하잖아”라며 무시하는 아내, “아빠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라며 벌레 보듯 하는 딸. 그가 하는 일이라곤 사진첩 속의 과거 딸을 보며 “이때가 제일 예뻤는데…”라며 웃는 것뿐이다.
영화는 ‘들깨파 중간 보스 강인구’보다 ‘희순이 아빠’에게 초점을 맞춘다. 가족을 위해 그는 조폭을 그만두려 하지만 쉽지 않다. 마치 매일 마음속으로 사표를 쓰는 우리 아버지처럼. 어떤 이는 이기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가 조직을 떠나지 않은 것은 ‘희순이 아빠’라는 신분이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한 감독은 조폭 가장 이야기를 담은 것에 대해 “조직 문화의 마초성이나 생존 경쟁이 일상의 가장이 겪는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자조적인 세계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다. 가족과 함께 넓은 집에서 함께 사는 것. 지금은 머리 감을 때마다 물이 끊기는 집에서 살지만 신도시 아파트 분양에 열을 올리고 강남을 동경하는 가장들처럼, 강인구는 틈만 나면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간다.
무엇 때문이냐고? 집에서 입 벌리고 있는 ‘새끼’들 때문이다. 집을 구경하면서 “여긴 우리 딸 방”이라며 웃는 그에게 정작 딸은 관심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집 근처 만두가게에 들러 “우리 딸 고기만두 좋아하는데…”라며 자랑한다. 그에겐 딸이 곧 삶의 희망이기에.
송강호는 “나도 올해 마흔이고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로서 강인구를 100%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날것’ 같다. 포장되지 않은 송강호 자신의 일상과도 같은 모습이 관객에게 스며든다.
가족을 떠나보낸 어느 날, 캐나다에서 온 가족의 비디오를 틀어 놓고 그는 비빔면을 먹다가 펑펑 운다. 그릇을 집어던지고 울다 지쳐 한숨을 쉰다. 그리고 깨진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레로 닦는다. 삶을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현실, 이것이 강인구의, 배우 송강호의, 이 세상의 모든 40대 가장의 가장 우아한 ‘최후’가 아닐까.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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