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병근 ‘콩나물 시루’

  • 입력 2007년 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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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시루

- 정 병 근

추, 추, 추, 요강에 오줌을 누며

할머니가 치를 떨었다

잠든 콩나물 시루에 몇 바가지 물을 내리고

할머니는 다시 누웠다

콩나물 무수한 대가리들이

노란 부리를 벌려 물을 받아먹었다

콩나물의 몸을 빽빽하게 빠져나온 물이

밑 빠진 독의 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안은 깊은 동굴이 되었다

똑, 똑, 똑 ……

콩나물 시루의 물방울 소리

식구들의 잠을 뚫고

억만 년 동안 떨어졌다

천장에서 무수한 石柱들이 내려왔다

-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천년의시작) 중에서

콩 자루 속에는 마법에 걸린 왕자들이 쿨쿨 자고 있었지. 겨드랑이를 간질여도, 귀를 잡아당겨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지. 할머니는 물 함지박에 솨르르 쏟아 하룻밤을 재우지. 부드러운 물의 입맞춤에 거짓말처럼 깨어난 왕자들은 주욱- 외발 기지개를 켜지. 컴컴한 시루 궁전에 옮겨 때마다 물을 내리면, 소복이 베수건을 들어 올리며 까치발을 하지.

그러나 이젠 잠든 콩 자루의 시간과 콩이 부푸는 시간과 시루 물을 주며 가슴이 콩닥거리던 소년의 시간은 모두 사라지고, 비닐봉지 속에 든 오동통 살찐 콩나물들만 식탁에 올라오지.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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