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프리즘]축구는 만인에게 평등하다?

  • 입력 2005년 1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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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는 인터밀란의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 동아일보 자료사진
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는 인터밀란의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 동아일보 자료사진
축구공은 둥글다. 그러나 축구장의 골대는 직사각형이다. 축구 경기장도 네모꼴이다. 축구경기는 그 각진 운동장에서 스물두 명의 발 다툼으로 이뤄진다. 울퉁불퉁한 발로 둥근 공을 차서 네모진 골대 안에 넣는 것이다. 사각형은 완강하다. 둥근 공은 그 ‘어두운 사각형’에서 빈틈을 좀처럼 찾지 못한다. 동그라미와 네모는 쉽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툭하면 어그러지고 튕겨난다. 그래서 축구 경기장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올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의 명문 부자구단 인터 밀란(1908년 창단)에 ‘축구경기를 갖자’고 제의했다.

“우리에게는 바람빠진 공밖에 없으니 경기에 사용할 볼을 준비해 오라. 우리는 당신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들을 ‘골바다’에 빠뜨리지는 않겠다.”

역시 ‘말 9단’ 답다. ‘멕시코의 체 게바라’ ‘반세계화 혁명 게릴라’…. 검은 복면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 프랑스 소르본대 출신. 그는 1994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에 맞춰 약 2주일동안 치아파스 원주민들을 이끌고 ‘반세계화’ 무장 봉기를 벌였다. 하지만 그뿐. 그 이후엔 한번도 무기를 들고 나서지 않았다. 대신 인터넷 등을 이용해 지구촌을 대상으로 이른바 ‘포스트모던식 혁명’을 개시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다. 우리의 말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폭탄보다도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인터 밀란 구단 측은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호응했다. 주장인 하비에르 사네티(32)도 “멕시코로 못 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사네티가 누구인가.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홍명보 같은 존재다. 세계 최고의 오른쪽 사이드 어태커로 별명은 ‘적토마’ ‘트랙터’. 그는 지난해 10월 동료들의 규칙 위반 벌금 등을 모아 5000유로(약 610만 원)를 치아파스 원주민에게 보내며 “우리는 더 좋은 세계에 대한 믿음과 세계화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 밀란의 ‘인터’는 ‘국제적’이라는 뜻. 그만큼 ‘클럽의 세계화’를 꿈꾼다. 외국 선수들 영입에도 적극적이다. 같은 밀라노를 연고로 하는 AC 밀란(1899년 창단)보다 더 개방적이다. 그동안 인터 밀란은 멕시코 치아파스 일대에 앰뷸런스와 축구장비 등을 지원해 왔다.

세계화를 추구하는 축구클럽과 세계화를 반대하는 혁명가의 만남. 완강한 네모꼴과 네모꼴의 경계선을 구르는 축구공. 이 모순의 접점에서 축구공은 과연 무슨 마술을 부린 걸까.

미주정상회담이 열린 4일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45)는 4만 시위 군중의 선봉에 서서 ‘반세계화’를 외쳤다. ‘축구스타에서 정치플레이어’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 출신. 하지만 한때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 물 쓰듯 쓰기도 했다.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은 그런 그를 가리켜 “공을 찰 발은 가졌지만 토론할 머리는 없다”고 비아냥댔다. 마침 마라도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발 대신 ‘신의 손’으로 승리를 낚았던 주인공. 과연 이번엔 ‘신의 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프랑스축구대표팀은 대부분 빈민가 뒷골목에서 자란 유색 이민 후손들이다. 이 중 프랑스령 과달루페 출신 수비수 릴리앙 튀랑은 최근 프랑스 소요 사태에 대해 “나도 교외에서 자랐지만 ‘쓰레기’는 아니다”며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렸다.

축구공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나 축구공 뒤에서 만인은 불평등하다. 찌그러진 축구공 앞에선 더욱 그렇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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