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잘 가라, 서커스’… 서커스처럼 사랑도 꿈도…

  • 입력 2005년 10월 8일 03시 00분


천운영 씨는 “‘잘 가라, 서커스’를 쓰면서 주인공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주인공들과 헤어지기 싫어 마지막까지 결말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천운영 씨는 “‘잘 가라, 서커스’를 쓰면서 주인공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주인공들과 헤어지기 싫어 마지막까지 결말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잘 가라, 서커스/천운영 지음/280쪽·9500원·문학동네

천운영(34) 씨가 처음 펴낸 장편 소설인 ‘잘 가라, 서커스’는 경기 부천시로 건너온 조선족 여인과 그녀를 좋아하는 형제의 이야기다. 형은 목을 다쳐 말을 제대로 못 하는데 신붓감을 구하러 중국에 가 릴레이 맞선을 보다가 ‘작고 가녀리지만 왠지 끌리는’ 옌지(延吉) 여인을 만난다. 이때 그와 동행한 동생은 차가운 시선으로 여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결국 ‘형수’가 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천 씨는 “서울의 갈빗집에서 만난 조선족 종업원한테서 애달프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몇 번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족들과 어울리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吉林) 성 곳곳을 쫓아다니며 쓴 ‘족필(足筆) 창작’의 힘이 지면 곳곳에 배어 있다. 단편 소설들에서 보인 천 씨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제대로 된 묘사력이다. 조선족들이 사는 풍정(風情)과 ‘조선족 한국어’가 이 소설 속에 살아 있다. 특히 림해화가 안마사로서 ‘세욕중심’에서 함께 일하던 가난한 친구 영옥과 요리점에서 헤어지는 장면은 절절하다. ‘영옥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내가 자꾸만 한숨을 쉬는 것을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했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시동생 윤호 역시 ‘남장 여자’가 아닐까 여겨질 만큼 섬세한 데가 있다. 며느리를 기쁨 속에 맞아들인 그의 엄마가 숨진 순간을 그린 장면이 그렇다. ‘…배롱나무 아래 누운 엄마를 보았다. 낮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 그늘 아래서. (…) 엄마는 한없이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마침 배롱나무 꽃 하나가 엄마의 약간 벌어진 입 위로 떨어졌다.…’

림해화처럼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한국의 F-2 비자,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친척들을 초청할 수 있는 동거방한사증을 원한다. 림해화는 “어쩌면 나는 한국을 ‘샹그리라(눈 덮인 산 속의 낙원)’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직접 와서 본 샹그리라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리 끝에 서서 로임으로 받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중국의) 청수동에서 반년을 꼬박 일해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 이래서 다들 한국으로 오려 하는구나. 이래서 한국을 못 떠나는 거였구나. 결국 이거였구나. (…) 궁전 모양이나 화려한 성 모양으로 근사하게 포장된 여관 건물들. 마천루처럼 솟은 건물들은 껍데기뿐인 빈 상자처럼 보였다.’

림해화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어릴 적 연모하던 조선족 사학도와 함께 들어가 봤던 발해 정효공주의 고분 속을 떠올릴 때인 것 같다. 림해화가 부천으로 건너온 뒤부터 이 소설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무엇보다 어두운 소재를 어두운 방식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흐름 아래 극적인 인과(因果)가 약하다는 점도 아쉽다.

작가 천 씨는 10일부터 독일 정부의 초청으로 라이프치히 근처의 예술인 마을 그라다로 옮겨가 두 달간 체류하며 집필할 기회를 가진다. 연말에 돌아와 다시 작업할 그의 새로운 글쓰기가 기대된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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