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오페라의 도시 伊 밀라노

  • 입력 2005년 1월 20일 15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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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중심 두오모 광장.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을 마주보고 있는 대성당 두오모는 1386년에 축조되었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단장한 것은 19세기였다. 하늘을 찌르는 크고 작은 135개의 첨탑과 대성당의 바깥벽 표면을 장식하는 조각상들은 자그마치 3400개나 된다. 사진 정태남 씨
밀라노의 중심 두오모 광장.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을 마주보고 있는 대성당 두오모는 1386년에 축조되었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단장한 것은 19세기였다. 하늘을 찌르는 크고 작은 135개의 첨탑과 대성당의 바깥벽 표면을 장식하는 조각상들은 자그마치 3400개나 된다. 사진 정태남 씨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 밀라노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 극장.

그 앞을 기웃거리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붙인다. 이 극장은 3년 동안 내부 공사를 하여 지난해 12월에 새로 선보였는데, 거의 7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가변성 무대와 창고, 서비스 공간을 확충했다고 자랑한다. 또 관객석마다 스크린을 설치해 오페라 대본을 이탈리아어뿐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로도 읽을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인다.

○ 스칼라 극장서 초연 베르디의 ‘나부코’ 통일 불씨로

극장 앞 광장에 서니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극장을 갈레리아는 도시의 응접실 같은 느낌을 준다

1901년 1월 27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이맘때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76∼78년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운 스칼라 극장은 전 시즌을 통해 베르디의 오페라가 가장 빈번하게 공연돼 온 곳이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는데 18, 19세기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은 오스트리아, 리구리아 지방은 프랑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지배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1842년 이 극장에서 ‘나부코’가 초연됐을 때의 일이다. 공연 중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이 흘러나왔다. 이 곡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모든 사람들이 즐겨 부르게 됐다.

그리하여 ‘베르디’라는 이름은 통일운동의 상징이 됐고 거리에는 ‘Viva V.E.R.D.I!(비바 베르디!)’라는 글씨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것은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 만세!)’의 약자로, 이탈리아 통일의 염원을 담은 문구였다.

세계적인 오페라의 전당 스칼라 극장. 그 앞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석상이 서 있다.

그들이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일을 이룩한 것은 ‘나부코’가 초연되고 거의 30년이 지난 1870년이었다.

바로 그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의 이름을 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가 스칼라 극장 앞 광장과 두오모(Duomo·대성당) 광장을 연결하는 통로다.

이탈리아 통일을 전후한 1856∼78년 세워진 갈레리아는 90도 각도로 십자가처럼 교차하는 대략 200m쯤 되는 긴 통로와 100여 m쯤 되는 짧은 통로로 이루어졌다.

갈레리아는 당시 철골과 유리를 사용한 설계 및 시공기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건축과 도시 맥락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이곳은 도시의 외부공간인 동시에 내부공간으로, 고급스러운 상가와 카페들이 있어 마치 도시의 응접실과 같다.

이곳은 ‘나부코’를 탄생시킨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1840년 젊은 베르디는 인간적인 슬픔과 잇따른 실패로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때 스칼라 극장의 흥행사이던 메렐리가 바로 여기서 그를 붙잡고 창작의 길을 열어주었다.

○ 200m길이 ‘갈레리아’-두오모 광장 빼어난 건축미 자랑

이 긴 통로를 걷다보면 자로 잰 듯한 직사각형의 넓은 두오모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그 맞은편에는 롬바르디아 평원을 뚫고 나온 듯한 거대한 고딕식 대성당이 원대한 힘으로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오르고 있다. 대성당의 수많은 첨탑과 조각상들이 신의 은총을 기원하며 합창하는 듯하다.

베르디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었다. 74세 때에는 오페라 ‘오텔로’를 완성했고 오페라 ‘팔스타프’를 작곡할 때는 이미 80대의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지켜준 신에게 바치는 종교곡을 쓰고는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900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두오모 광장과 거리에 울려퍼지자, 수천 명의 시민들도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탈리아 통일의 혼을 불태우게 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음악가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으레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베르디 음악원’ 낙방한 베르디▼

이탈리아의 유명한 음악교육기관인 밀라노의 국립 베르디 음악원. 그 전신은 밀라노 음악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베르디는 후에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된 이 음악원의 출신이 아니다. 아니, 이 음악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입학을 거부당했다.

1832년, 19세의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하고 만 것. 그는 당시 나이가 입학제한 연령보다 4세나 많았고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이 아닌 다른 지방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또 음악적으로는 피아노 테크닉이 잘못되어 있고 작곡도 허술하다고 평가받았다.

고배를 마신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에서 한때 활동한 적이 있는 작곡가 라비냐에게 3년 동안 배우면서 작곡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터득한 후 고향 부세토로 내려가 결혼한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1838년 거처를 밀라노로 완전히 옮긴 그는 2년 사이에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어버리는 참담한 슬픔을 겪는다.

또 공연이 실패하면서 처절한 고통을 겪었지만, 신이 끝내 그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부코의 성공으로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베르디는 오페라의 극적인 구성뿐 아니라 극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 관현악법을 시도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했다.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가끔 위대한 선물을 내려 주는데, 인간적인 고통도 함께 내려서 이를 통하여 하늘의 선물을 더욱더 값지게 하기도 한다. 바로 베르디의 경우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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