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베니티페어’…상류사회 향한 욕망의 미로

  • 입력 2005년 1월 13일 15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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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사진 제공 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20세기 영국 역사학자 E H 카는 “영웅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웅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우연적인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를 철저히 구현해낸 인물이라는 해석이다.

영화 ‘베니티 페어’의 여주인공 베키 샤프는 그런 의미에서라면 한 시대를 전형적으로 살아낸 ‘영웅’ 캐릭터다. 19세기 영국작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테커레이의 동명 소설(1848년 출간)에서 창조된 이 여인은 타고난 미모와 재능을 이용해 시대가 만들어낸 균열을 비집고 날아오르려 했던 ‘욕망의 인간’이다.

‘베니티 페어’의 시대적 배경은 1802∼33년.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유럽 전역에 전염병처럼 실어 나르던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생을 마치지만(1821년) 진보라는 유행은 구시대 질서와 맞부딪쳐 곳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자본주의의 성숙은 중산층이라는 신흥계급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욕망은 마차를 대신해 달리게 된 기차(맨체스터∼리버풀 구간·1830년)처럼 거칠 것 없는 속도로 관습을 전복하며 신세계를 향해 팽창해 나간다.

가난한 화가 아버지와 프랑스인 오페라 가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베키 샤프(리즈 위더스푼)는 이런 시대의 등을 타고앉아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운명과 흥정을 벌이기 시작한다. 일찍 부모를 여읜 뒤 기숙학교에서 하녀처럼 부려지며 공부를 마친 베키는 결혼으로 일거에 신분상승을 노린다. 그러나 재력가 집안의 딸인 친구 아멜리아(로몰라 가레이) 오빠와의 결혼은 아멜리아의 오만한 약혼자 조지(조너선 리스 마이어스)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고, 베키는 몰락한 귀족 크롤리 경 집의 가정교사로 입주한다.

인생막장일 것 같던 이곳에서 베키는 뛰어난 재치와 예술적 감수성, 프랑스어 구사능력 덕분에 백만장자인 크롤리 경의 노처녀 누이 미스 크롤리의 신임을 얻는다. 이어 미스 크롤리의 상속자로 예정된 크롤리 경의 둘째아들 로든 대위(제임스 퓨어포이)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그와 비밀 결혼한다. 그러나 승승장구이던 그녀의 계획은 ‘낭만적 사랑의 예찬자’였던 미스 크롤리가 뿌리 깊은 보수주의자의 본심을 드러내며 로든의 모든 상속권을 박탈해버림으로써 다시 한번 수포로 돌아간다. 베키는 임신한 몸으로 프랑스와의 전투를 위해 출정하는 남편을 따라 나서고 로든 대위는 워털루 전투에 임하는데….

무성영화시대부터 시작해 일곱 번째로 영화화된 2004년 판 ‘베니티 페어’가 제작단계부터 주목받은 이유는 영화에 참여한 세 여인 때문이다. ‘몬순웨딩’으로 모국 인도에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을 안긴 감독 미라 네어, ‘금발이 너무해’ 1·2편의 잇따른 흥행 성공으로 할리우드의 흥행메이커로 자리매김한 스탠퍼드대 출신의 금발미녀 리즈 위더스푼,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거머쥔 바 있는 여성제작자 도나 지글리오티….

그러나 이 재능 있는 여자들의 결합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보기에 지루한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데 멈추고 말았다. 변화의 에너지로 꿈틀대던 당대의 기운은 화면에 흘러넘치지만 가슴에 와 닿는 매력적인 인물이나 뚜렷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줄거리가 없어 관객은 영화 속에서 길을 잃는다.

혼돈의 근원적 이유는 주인공 베키가 이 2시간17분짜리 영화의 뚜렷한 구심이 되지 못한 데 있다. 소설로는 ‘베니티 페어’의 모작(模作)으로 치부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위대한 영화로 관객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육화해낸 스칼렛 오하라(비비언 리)라는 존재 때문이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존력도, 인간의 미워할 수 없는 허영심이나 이기심도, 심지어 레트 버틀러의 위악적인 사랑과 헌신조차도 비비언 리의 작열하는 연기를 통해 빛을 얻었다. 그러나 리즈 위더스푼은 “내가 얼마나 강한 여자인지 알잖아요. 뭐든 가질 거고 이겨낼 거예요”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비비언 리만큼의 원초적 흡인력을 갖기에는 역부족이다. 미라 네어 감독 역시 “사람이 가진 여러 겹의 허울과 위선의 얼굴을 드러내겠다”던 포부와는 달리 베키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간군상화(畵)’로 교직하지 못했다. 남은 것은 아찔할 만큼 아름다운 의상과 세트, 경치뿐.

빅토리아 시대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요기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같은 인간 파노라마를 기대한다면 결코 흡족하지 못할 것이다. 2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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