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성완경]문화는 넘치는데 예술은 없다

  • 입력 2005년 1월 3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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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첫날 새벽 경남 남해의 ‘해오름 예술촌’. 폐교된 한 초등학교에서 영상과 음악이 어울린 해맞이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주인공은 컴퓨터 아티스트 정순남 씨.

해돋이는 해 뜨기 전 어둠 속에서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 더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이 예술촌의 테라스와 운동장 가장자리를 서성이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윽고 건물에 내건 스크린 위에 ‘빛과 소리’ 영상작품이 투사되고 이것은 사위가 밝아질 때까지 계속됐다. 해가 바다에서 미끈 빠져나오기 직전 다섯 개의 북소리가 한껏 고조되다 멈췄다. 이때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투사되던 일출 영상도 서서히 사라졌다. 우리는 2층 카페에 올라가 함께 갈탄 난롯불을 쬐고 차를 마셨다. 황금빛 햇살로 공기가 점차 따뜻해졌다.

해오름 행사의 이런 좋은 기억 속에 새해 우리나라 문화계에 관련된 소회를 펼쳐 본다. 하나는 문화권력을 경계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콘텐츠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작년과 재작년 우리 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 많은 문화정책이 입안되고 추진됐다. 문화에 대한 주목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문화관광부 예산이 정부 예산의 1%가 되기도 했다. 다행스럽다.

그러나 조심할 것도 있다. 문화 분야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추동력이 민간 분야의 그것을 압도한다. 정책, 돈의 조달과 집행, 각종 위원회의 운영에서 ‘담당자’가 큰 힘을 행사한다. 그 과정에서 ‘아류적 발전’과 폐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도시개발이나 조각공원, 공공미술을 보자. 이를테면 우리나라 조각공원은 거의 유원지 수준이다. 잘 들여다보면 건축, 조경, 미술, 공학의 각 분야가 따로 놀고 그것들의 조악한 조합일 뿐이다. 총체적 디자인이나 책임자의 비전과 철학이 녹아든 프로젝트, 컬처럴 엔지니어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예술 일반과 문화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료들이 세우고 집행하는 정책은 효율성 위주로 맹속으로 달린다. 그런 가운데 행정 실무자가 들러리 위원회를 내세워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위원회 기술’, ‘발주 기술’은 여전히 큰 위력을 발한다. 찢어 나누고 써버리는 것. 운영예산도 프로그램도 없이 거창하게 짓고 나서 쓰지 않는 문화시설, 전문가 채용 없이 고가로 구입한 뒤 팽개친 장비. 전문가의 양식과 장인성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 이젠 반성해야 한다.

두 번째는 예술을 보는 시선의 문제다. 나라 전체에 떠도는 담론이 있다. 문화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젠 하나의 화두이자 정책구호이며 거의 강박이다. 이는 ‘문화콘텐츠 진흥’과 ‘문화산업 부국론’으로 나타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산업과 게임산업, 디자인, 정보기술(IT) 강국, 그리고 최근 부쩍 드세진 ‘한류’ 열풍이 그것이다.

예술의 각 장르는 통틀어 기초예술이란 이름으로, 이른바 문화콘텐츠의 펀더멘털이란 논리 속에서 겨우, 희미하게, 형식적으로 옹호될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점차 문화예술이라는 복합명사로, 그 문화예술이 다시 문화콘텐츠라는 말로 대치되면서 예술 자체로 얘기되는 기회가 줄어든 점을 주시해야 한다. 무용성과 무위와 침묵 그리고 비평과 전복으로서의 예술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문화는 장사가 되지만 예술은 장사가 안 된다. ‘겨울 연가’는 돈을 벌지만 반 고흐는 굶어죽는다. 새해에는 이런 현상이 무얼 의미하는지 깊이 새겨 봐야 한다.

성완경 미술평론가·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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