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생활속에 들어온 미술품

  • 입력 2004년 11월 4일 16시 18분


코멘트
《가을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화랑가에 가봤습니다.거리 곳곳에 붙은 전시 플래카드들이 곱게 물든 단풍 색상과 닮았더군요.좋은 것 많이 보고 좋은 감정 많이 느끼고 싶어집니다.그 어느 때보다 미술 행사가 풍성한 때입니다.

지난달에는 마니프 서울 국제 아트페어, 한국미술품경매와 서울옥션의 미술품 경매가 열렸습니다. 화랑들에는 볼만한 전시가 꽤 들어 있었고요. 6일부터 11일까지는 국내 대부분의 화랑들이 소장품을 판매하는 화랑미술제도 열립니다.

큰 화랑보다 작은 화랑일수록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쑥스러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스스로 전시 오브제가 된 것처럼 큐레이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까 거북하기도 했지요.

처음이 제일 어렵다고 했나요. 일단 가슴을 펴고 화랑에 들어서니 그림들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추억, 사랑, 희망이 그림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났습니다.

표갤러리가 아트컨설팅한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고급 빌라 가정. 식탁 옆에 곽훈의 20호 크기 작품 ‘다완 시리즈’를 걸어 편안한 주거 공간을 연출했다. -사진제공 표갤러리

어느 화랑에 걸려 있던 1호짜리 작은 꽃 그림은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얼마 후 집 거실 벽 한쪽에 수줍게 걸려 있었으면 해요.

화랑을 돌아다녀 보니 저 같은 사람이 제법 늘었다네요. 미술품을 먼발치에서 감상하던 시대는 가고, 곁에 두고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지요.

아직은 돈을 들여 미술품을 사기가 겁난다면 화랑의 미술품 렌털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세요. 미술품 하나 거실에 들여놓으실래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보는 것이 미술품이라면 좋겠습니다.》

○ 문턱 낮아진 미술품 경매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옥션의 제1회 무가 경매. 초보 수집가를 비롯한 미술 애호가 500여명이 모여 큰 관심을 보였다.-강병기기자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국내 최대의 종합 경매회사 서울옥션의 ‘제1회 무가 경매’가 열렸다.

보통 미술품 경매에 참가하려면 회비나 보증금을 내야 하지만 이 무가경매는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인사동에 구경나온 노인들, 평범한 40대 중년 여성들, 미니스커트에 어그 부츠를 신은 발랄한 여학생들, 군복차림의 군인도 눈에 띄었다.

경매 시작 5시간 전부터 전시된 물품은 유병엽의 ‘해변의 여인들’, 김점선 판화, 고 박정희 대통령 친필 사인 사진, 가수 조영남의 ‘항상 영광’, 조선시대 화조도 8폭 병풍, 중국 송청자 원형벼루 등.

추정가가 억대에 달하는 보통 경매와 달리 대부분 추정가 100만원대 미만으로, 경매 시작가도 1만원이나 10만원부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시품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음료를 마시며 처음 만난 다른 참가자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눴다. 마치 외국 풍물벼룩시장 같았다.

사람들 대부분이 경매에 처음 참여하는 것이어서 경매사는 초반에 진땀을 뺐다. 화랑에서 25만원 정도에 팔리는 소형 판화 작품은 4만∼8만원에 싱겁게 팔렸다. 채색 해태, 자수 안경집, 목제 오리 등 전통 민속품들은 최초 경매 시작가인 1만원에 그대로 낙찰되기도 했다. 초보자들이 용감하게 번호판을 들기란 쉽지 않으리라.

이날 처음 경매에 참여한 주부 임정화씨(38·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가끔 인사동 화랑가에 들러 쇼윈도에 보이는 작품들을 구경하기만 해온 ‘소소한 미술 애호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로트렉 등의 복제 포스터들을 10달러에 산적은 있지만, 아직 작가의 ‘작품’을 사 본 적은 없다.

“다음 번 경매에는 출품 작가에 대해 미리 공부한 뒤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하고 싶어요. 포스터와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거든요.”

○ 미술품을 얻는 기쁨

수준 높은 경지에 오른 컬렉터들도 처음부터 작심하고 미술품을 사 모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대개는 좋은 작품을 곁에 두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해 안목이 차츰 높아졌다.

정신과 전문의 김동화씨(34)는 레지던트 시절인 1999년 박수근의 1950년대 연필 스케치 작품 ‘초가’를 생애 처음 샀던 순간을 지금도 뭉클하게 기억한다.

드로잉 작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그로리치 화랑 앞을 걸어가는데, 맑고 깨끗한 느낌의 연필 스케치 작품이 가로 18.2cm, 세로 12cm 크기로 걸려 있었다. 크기가 작아 가격도 저렴하겠거니 용기를 내 가격을 문의했다. 400만원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돈을 모았다. 행여 다른 사람이 사갈까봐 노심초사하며 거의 매일 화랑 앞을 지나쳤다. 그 해 가을, ‘화랑 미술제’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 그림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화랑 주인에게 ‘그림 짝사랑’을 고백하며 부족한 돈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림을 좋아하는 분 같다”며 100만원을 깎아줬다.

그림을 손에 넣은 이후 인사동의 액자 가게를 찾아가 소박한 나무 액자틀을 맞췄다. 단정하게 서 있는 초가 두 채 옆으로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그림과 잘 어울렸다.

“하염없이 그림을 쳐다보느라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었죠.”

김씨는 이후 지금까지 이응노, 이중섭, 김환기, 박생광, 장욱진 등 국내 유명 작가들의 드로잉 작품 40여점을 사 모으게 됐다. 덤으로 가격도 올랐으니 기쁨도 더욱 크다.

“김흥수, 구본웅 화백의 작품은 미술품 경매에서 유찰된 것을 산 것입니다. 평소 화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록과 미술 잡지 등을 부지런히 보면 안목이 길러집니다.”

요즘에는 신진작가 작품이나 중저가 미술품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달 100만원 미만 미술품 100여점을 판매한 서울옥션의 ‘이지아트2004’와 마니프 서울 국제아트페어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옷 살돈 아껴 작은 그림 구매

2002년 3월 서울옥션 경매 참가자 300명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참가자의 절반 이상(54.6%)이 연간 소득 5000만원 미만이었다. 1억원 미만까지 합치면 89.1%나 됐다.

또 직업별로도 임원 이상 기업인과 의료인(37.7%)이 가장 많긴 했지만 일반 직장인(21.8%)이나 전문직 종사자(12.6%)도 적지 않았다. 미술품을 즐기는 계층이 과거 소수 부유층에서 점차 직장인이나 전문직 종사자 등 ‘평범한’ 사람들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1호 그림전’, ‘작은 그림전’ 등을 기획해 온 선아트센터 김창실 대표는 “고급 부티크 옷을 살 돈으로 화랑에서 유명 작가의 작은 그림을 사는 30, 40대 여성들이 많다”면서 “그림을 사는 그들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어떤 미술품을 어떻게 실내에 배치해야 좋을지 화랑에 문의해오는 사람들도 늘었다.

가나아트센터, 박여숙 화랑, 박영덕 화랑, 표갤러리 등 많은 화랑들은 이런 고객들에 맞춰 컨설팅을 해주거나 미술품 렌털 마케팅을 적극 펼치고 있다.

박여숙 화랑의 이진숙 큐레이터는 “작품가 500만원 미만의 작품은 구입하지만, 그 이상 금액은 작품가의 3∼7%를 내고 대여하는 고객이 많다”고 말한다.

주부 신수연씨(39)는 지난해 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57평형 아파트로 이사 온 뒤 서울옥션에 컨설팅을 부탁했다. 아트컨설턴트들이 여러 번 방문해 집안 인테리어와 가족 라이프스타일 등을 파악해 미술품을 추천했다.

거실 소파 뒤에는 박승순 유화 작품 ‘정원’을 걸었다. 방 사이 복도에는 메탈 느낌이 강한 김찬일 그림을, 식탁 옆에는 푸른색이 강렬한 박승순 그림을 두었다. 대여비는 모두 월 26만원.

“고급 가구를 들여놓은 것보다 만족감이 훨씬 큽니다. 갤러리 같은 집에서 살다보니 생활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기분이에요.” 그는 이 렌털 미술품을 아예 사기로 최근 결정했다.

서울옥션 아트컨설팅팀 박지온씨는 “강남 아파트들에는 모던 인테리어 트렌드에 따라 하상림, 김찬일, 손진아, 홍승혜 등 색감이 화려하거나 미니멀한 작품이 많이 걸린다”고 말한다. 일부 인테리어 업체는 이들 작가의 화풍을 베낀 모조품을 유통시킨다는 말까지 들린다.

미술품이 인테리어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미술계의 한숨 섞인 우려도 있지만, 미술품이 대중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은 궁극적으로 반갑다. 작가의 예술 혼은 가까이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롭게 발견되고 공유된다.

▼미술품 경매-랜털 가이드▼

미술품 경매와 미술품 렌털 서비스는 국내 미술의 대중화를 이끈다. 국내 미술품 경매의 대표적인 업체는 ㈜한국미술품경매와 ㈜서울옥션 등. 표갤러리, 박여숙화랑 등 서울 시내 주요 화랑들은 미술품 렌털 서비스를 한다. 참가와 이용방법을 알아본다.

○ 경매:입찰 보증금 없는 무가 경매도

▽입찰 보증금=한국미술품경매에서는 경매 1시간 전까지 구입 희망 미술품 최저 낙찰가의 20%를 입찰 보증금으로 내야 한다. 구매하지 않으면 돌려받는다. 서울옥션은 인터넷 홈페이지(www.seoulauction.com) 등을 통해 정기 회원(연회비 10만원)으로 가입해야 입찰 자격을 갖는다. 단 지난달 말 시작한 ‘무가 경매’는 입찰 보증금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경매 참여=현장 응찰, 서면 응찰, 전화 응찰 등이 있다. 현장 응찰은 경매 당일 안내 데스크에 등록하고 낙찰 받고 싶은 작품에 대해 번호표를 들어 구매의사를 밝히면 된다. 현장에서 참여할 수 없을 경우 서면으로 입찰 희망 금액을 미리 내거나, 경매장 직원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낙찰 이후 수수료=한국미술품경매의 구매 수수료는 부가가치세를 포함해 낙찰가의 8%, 위탁 수수료는 낙찰가의 11%이다. 서울옥션은 낙찰가 중 5000만원까지는 낙찰가의 10%(부가세 별도)를 적용하고 5000만원 초과분은 8%를 적용해 합산한다.

○ 렌털 서비스 :진품 3∼6개월 장기대여

▽렌털 문의 및 접수=서울옥션을 비롯한 서울 시내 주요 화랑들은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해외 작품, 판화, 사진, 조각, 신진 작가 작품에 이르기까지 1000여점의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미술품을 렌털해 준다. 일반적으로 작품가의 3∼7%를 매월 임대료로 산정하고 3∼6개월 장기 대여한다. 작품가가 높을수록 임대료율은 낮아진다.

▽아트 컨설턴트 방문 및 상담=렌털 접수를 하면 아트 컨설턴트들이 수차례 방문, 상담한다. 전반적인 실내 인테리어 분위기, 렌털 신청자의 취향 등을 파악한 뒤 원하는 작품 수의 2, 3배수를 뽑아 추천한다. 실내 인테리어에 대입한 시뮬레이션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품 설치와 유지·보수=작품이 선정되면 직접 설치를 해 주고, 3개월에 한번씩 방문해 유화의 표면에 코팅 처리를 하거나 브론즈 조각을 닦는 등 클리닝 작업을 한다. 단 사용자가 작품에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는 사용자측에서 전액 보상해야 한다. 표갤러리는 작품가의 0.5∼1%를 보험료로 내 리스크를 줄이도록 운영한다.

▼서울의 가 볼만한 갤러리와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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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그래픽=이진선기자 geran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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