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젠 미래를 말하자]구한말은 아직도 계속되는가

  • 입력 2004년 8월 12일 18시 46분


코멘트
해산되기 직전의 국왕 시위대 모습. 국왕의 호위를 위해 궁궐에 남아있던 약 2000명 이 시위대는 1907년 일본의 강요로 해산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해산되기 직전의 국왕 시위대 모습. 국왕의 호위를 위해 궁궐에 남아있던 약 2000명 이 시위대는 1907년 일본의 강요로 해산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대립과 반목, 국론 분열, 지도층의 리더십 부재,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

100여년 전 구한말(舊韓末)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한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21세기를 시작한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쇄국으로 움츠린 채 변화를 거부하다 결국 망국(亡國)의 길을 걸었다. 한물 지난 주자학에 얽매인 채 서구 문명의 위력을 모르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이 힘을 얻어 문을 걸어 잠근 사이에 국력은 갈수록 소진됐다.

개화를 향한 몸부림도 있었지만 국민의 열망을 하나로 통합해 내지 못했다. 이들 역시 국제정세에 어두워 열강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한계를 지녔다.

19세기 말부터 줄줄이 이어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안으로는 갈등을 키우고 밖으로는 외세의 개입을 자초했다.

고종과 집권 세력은 부국강병의 비전을 보여 줄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 많은 지식인들도 나라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못 보고 국난 극복의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었다. ‘존황양이’를 기치로 내걸고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 주체세력은 집권 후 ‘서양의 힘’을 깨닫고 서양문명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한편 독립국가 유지, 나아가 부국강병이란 국가적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정부 고위 인사들을 서구에 보내고 국비(國費)로 청년들을 유학시켜 근대문명을 내재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게 벌써 19세기 말의 일이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격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한쪽은 ‘지배하는 나라’로, 다른 한 쪽은 ‘지배당하는 나라’로 처지가 갈렸을 때 ‘패자의 변명’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까.

당시 조선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이에 대한 대비의 유무였다. 지도층이 한치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내부 갈등에만 매달리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는 것을 100년 전 역사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박지향(朴枝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100여년 전 개화파나 위정척사파 모두 국제정세에 무지해 주변 열강에 휘둘렸던 점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는 “지금도 사회 지도층이 미국 및 중국과의 친소(親疎)문제나 과거 정체성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등 한심한 수준의 국제 감각에 머물러 있다”며 “미래의 국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