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숨은 주역]<3>오태학 화백 아내 김영지씨

  • 입력 2004년 1월 16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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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 오태학 화백의 아내이자 화가인 김영지씨가 남편의 작품 앞에 앉았다. 그는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도 눈물을 훔친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남편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다시 붓을 들게 한 숨은 주역이다. -박주일기자
산동 오태학 화백의 아내이자 화가인 김영지씨가 남편의 작품 앞에 앉았다. 그는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도 눈물을 훔친다. 헌신적인 사랑으로 남편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다시 붓을 들게 한 숨은 주역이다. -박주일기자
한국화가 산동 오태학(山童 吳泰鶴·67·중앙대 명예교수)씨. 홍익대 3학년 재학 중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해 일찍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랑 이종상(一浪 李鍾祥)씨와 함께 한국화단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다. 그는 5년 전 뇌중풍으로 쓰러지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그는 왼손으로 그린 그림들을 들고 대형 회고전을 가지면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운명을 이겨낸 거장의 투지 앞에 전시장을 둘러본 사람들은 경탄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내 김영지씨(50)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헌신적인 간호로 남편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다시 붓을 들게 한 숨은 주역이었다.

남편과는 대학(수도여자사범대·현재 세종대) 3학년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그는 우연히 스승의 화실에 들렀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고교 3년 때 경복궁에서 열린 국전 추천작가전에서 보고 마음에 찍어놓았던 작품이었기 때문. 그림으로 맺어진 놀라운 인연은 사제의 연을 넘어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다.

“결혼 같은 거 안 한다”는 얼음장 같은 화가의 고집을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녹인 그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43세 신랑과 결혼했다.

사제지간인 데다 17년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여보”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아내,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무뚝뚝한 남편.

아내는 그림 공부라도 제대로 해볼까 생각했지만 걸핏하면 남편이 자존심을 긁는 바람에 자신의 그림 한 장 떳떳하게 내보이질 못했다. 그저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자 곁에서 아들 딸 낳고 사는 것이 행복이려니 하며 살았다. 그러다 벼락 맞은 듯 닥쳐온 남편의 뇌중풍.

자존심 강하고 그림에 집착했던 남편은 자신의 불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어버리겠다”는 남편을 붙잡고 몸의 불구가 마음의 불구가 될까 노심초사하면서 그의 손과 발이 돼주며 간호한 지 2년여. 마침내 오 화백이 오른손을 포기하고 왼손으로 붓을 잡던 날, 아내 김씨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때로 사랑이란 그토록 무작정, 무한정일 수 있다.

그는 남편을 사랑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변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남편을 향한 사랑 속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나 고맙다”고 했다. 지난해 5월 열었던 생애 첫 그의 개인전은 모든 것을 던져 한 남자의 예술과 혼을 사랑했던 아내의 사부곡(思夫曲)이기도 했다.

대학시절 첫 수업시간에 오 화백이 자신에게 던진 한마디. “보이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혼이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를 평생 주문(呪文)처럼 외우고 사는 김씨. 그는 “남편이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있게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흡사 영혼이라도 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맹목(盲目)의 아내’의 표정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오태학 화백이 말하는 '나의 아내' ▼

아내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는 주문에 산동(사진)은 쑥스러워 했다. 이제 쉰이 된 아내를 “아직도 어린애지 어린애”라고 말하며 허허 웃었다.

고난은 때로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지만,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산동은 후자였다. 평생 자기 안에만 매몰됐던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통해 바깥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아내가 있었다. 애정표현을 너무 안 한다는 아내 김씨의 말이 생각나 “사모님한테 고마우시죠?” 눙치듯 물었다. 그러자 산동은 소년처럼 얼굴이 발개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같이 사는 사람이니까 좋고 나쁘고가 없었는데, 아프고 나니까 집사람 희생이 너무 눈물겹지.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중히 여겨 돌봐주니 안 고마울 수 있는가.”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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