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객원大記者 최정호 "현대사 문제 폭넓게 다루고 싶어"

  • 입력 2004년 1월 13일 18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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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뿔테 안경과 날카로운 눈빛의. 1960∼70년대 동유럽 지식인 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최정호(崔禎鎬·71) 울산대 석좌교수. 7일 동아일보 사상 첫 ‘객원 대기자(大記者)’로 위촉된 것에 대해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는 동아일보(올해 84주년)에서 대기자로 일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1955년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독일 베를린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20여년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한 후 현재 울산대에서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년이면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지 50년이 된다.

한국일보 독일 특파원 시절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보며 이념대립이 치열했던 20세기 현대사 문제에 폭넓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현대사 관련 분야는 언론사에 가장 많은 정보가 있으므로 현대사야말로 대학과 언론이 공동 연구해야 할 분야”라며 ‘대기자’로서 현대사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최근 해방공간의 좌우이념 대립 등 현대사와 관련된 논란이 무성한데….

“안정된 사회공동체라고 한다면 미래의 전략에 대해서는 다툴 수 있겠지만, 과거 해석에 있어서는 공통분모를 가져야 하지요. 가장 중요한 과거인식은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건국과 탄생의 역사에는 콘센서스를 가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있어서는 안 됐고 다른 공화국이 들어설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지적 오만이지요.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비에트화됐을 것이고, 1989년 동유럽처럼 붕괴되지도 못해 오늘날 북한 체제처럼 됐을지도 모릅니다. 해방공간에서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 박헌영의 인공노선,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 후 통일정부 수립노선 세 가지가 있었는데 좌우합작 노선은 이상적이지만 현실로서는 불가능했지요. 이것은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쿠데타가 증명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좌우합작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불과 1, 2년 만에 경찰권을 쥐고 있던 공산당이 우파의 외무장관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 독재정권을 수립해버리거든요. 북한의 경우 같은 공산계열인 남로당과 북로당 사이에서도 피의 숙청이 벌어져 김일성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했는데, 하물며 좌우합작 정부가 현실적으로 가능했겠습니까.”

―독일 통일 과정에 비춰봤을 때 한반도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할까요.

“독일의 ‘동방정책’은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국토분단 극복보다는 민족분리를 치유하자는 정책이었어요. 분단의 경계선은 놔두고 국경을 맞댄 외국처럼 자유롭게 왕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권력과 언론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에 포위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민권운동가였던 노 대통령이 비로소 대통령이 됐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는 징후로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존 F 케네디의 일생을 다룬 전기 중에는 ‘케네디는 날이 갈수록 대통령을 닮아간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처음부터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빨리 적응하느냐 늦게 적응하느냐일 뿐이지요.”

최 교수는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에서 주관해 ‘인류의 지적 창조력’이 만들어낸 문화유산을 선정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예술인과 지성인이 참여하는 ‘40인 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최근에는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한국의 문화유산’(나남출판)을 펴내는 등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최 교수는 “1955년 2월 신문사 수습기자로서 내가 처음 쓴 기사는 서울 계동 한옥에 마련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 빈소 스케치 기사였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사에서 인촌의 역할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유럽대륙에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 스위스 덴마크의 몇 신문을 빼놓고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신문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독일에는 6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신문이 없어요.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독재정권 시대를 뚫고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게 된 것은 한국 언론의 커다란 성취입니다. 인촌의 큰 인품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인촌 주위에는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동아일보는 주권 없는 나라의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고 ‘민족어 수호’, ‘현충사 성지화’, ‘행주산성 복원’ 등 국사 지키기 운동도 벌였습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일제강점기 젊은이들에겐 동아일보가 정부를 대신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어요.”정리=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사진=박주일기자 fuzine@donga.com

▼최정호(71) 객원 大記者▼

△서울대 철학과 졸업(1957)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박사(1968)

△한국일보 기자, 베를린특파원,

논설위원(1955∼72)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1968∼76)

△중앙일보 논설위원(1972∼75)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1976∼98)

△한국신문학회 회장(1977∼79)

△한국미래학회 회장(1991∼99)

△문화비전2000위원회 위원장(1997∼2001)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1999∼2000)

△울산대 석좌교수(1999∼현)

△저서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예술과 정치’ ‘한국의 문화유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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