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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월 8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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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겨울 세일이 시작되자 여느 세일 때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세 곳에 긴 줄이 섰다. 샹젤리제의 루이뷔통 매장과 마들렌 성당 앞의 구치 매장, 그리고 샤를 드골 공항의 면세처리 창구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프랑스인은 드물다. 대부분 동양계이고, 더러 아랍계나 아프리카계가 섞여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인들이 세일을 외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마다 겨울 세일 첫날이면 프랑스 TV도 세일 풍경을 내보낸다. 백화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쇼핑객들은 문을 열기가 무섭게 줄달음친다. 세일 전 찍어두었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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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달려가는 곳은 한국에서 ‘명품(名品)’으로 불리는 ‘뤽스(Luxe·사치품)’ 매장은 아니다. 전자제품 주방용품 매장이나 철 지난 의류를 무더기로 쌓아놓고 파는 곳이다. TV에는 2, 3명의 손님이 TV나 주방용품을 붙잡고 ‘내가 먼저 찍었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단골로 나온다.
파리지앵 가운데는 가족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에 사용할 선물을 세일 때 한꺼번에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세일 때를 기다려 가족들이 입을 중저가 의류를 대량 구매하기도 하고, 식품이나 와인까지 비축하기도 한다.
더 알뜰한 사람은 2차 세일을 기다린다. 세일 시작 후 2∼3주가 지나면 재고정리를 위해 물건 값을 더 깎아준다. 이때는 거의 반값 이하다. 문제는 원하는 물건이 그때까지 남아 있느냐다.
프랑스인들에게 세일은 큰맘 먹고 비싼 물건을 사는 때가 아니다. 연중 필요한 물건을 구매계획에 따라 싼 값에 대량 구매하는 시기다. 프랑스 백화점 1년 매출액의 40% 정도가 두 달 동안의 여름 겨울 세일 때 나간다.
그러나 올해 겨울세일을 앞두고 유통업계에서는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계속된 경기침체로 프랑스인의 소비심리가 얼어붙었기 때문.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 매출은 재작년에 비해 20%가량 줄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여성의 70%는 ‘아직도 경기침체기’라며 이번 겨울세일에도 지갑 열기를 꺼렸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문 편법 세일까지 등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세일은 엄격히 법으로 규정돼 있다. 세일 품목은 최소 30일간 매장에 진열했던 상품이어야 하고, 30일 동안의 판매가격 중 최저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인하를 해야 한다. 세일용 상품을 따로 만들거나 세일 직전 가격을 올렸다가 세일 때 내리는 편법을 막기 위한 조치다. 세일기간은 대개 4주이며 가격인하폭은 30∼50% 정도.
그러나 지난해 12월부터 가격인하를 실시하는 매장이 적지 않았다. 일부 상점은 단골손님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세일 직전 특별할인을 실시했다. 프랑스 TV 방송은 편법 세일의 현장을 몰래카메라로 고발하기도 했다.
세일 때면 파리의 명품 매장도 세일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다수 파리지앵의 발길이 닿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일 때면 명품 매장 매출도 급증한다. 세일만 되면 마치 ‘성지를 찾는 순례자’처럼 한국 일본 중국 홍콩 대만 등지에서 여행객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BBC 방송도 파리 샹젤리제 루이뷔통 매장이 물품구입 한도를 1인당 1개로 제한하자 동양인들 사이에 ‘대리구입’이 판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인 ‘명품 쇼핑객’ 행렬은 이제 파리의 갈르리 라파예트, 프렝탕 백화점이나 생토노레 같은 상점가를 벗어나 교외의 할인매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평소에도 30%가량 물건 값이 싼 할인매장은 세일 때면 30∼50%를 더 깎아준다.
한국 여행객이나 배낭여행 대학생들은 가족 친지 이웃의 구매부탁과 함께 신용카드까지 받아온다. “가격인하에 면세까지 받으면 프랑스 여행비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애국심만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일했던 교민은 “프랑스인 백화점 직원들이 ‘왜 한국 일본 중국 손님들은 루이뷔통이나 구치처럼 남들이 찾는 브랜드, 그중에서도 남들이 사는 물건만 사려고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설명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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