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송기중/삼국시대 通譯 필요했을까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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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극장가에서 영화 ‘황산벌’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런저런 장면들이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군과 백제군의 ‘사투리 싸움’이 흥밋거리라고 한다. 과연 신라 사람들과 백제 사람들은 서로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를 썼을까?

신라 백제 고구려 세 나라의 말이 같았느냐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의 관심사였다. 언어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항상 변화한다. 몇 년 혹은 몇 십년 만에 전혀 다른 언어로 바뀌지는 않지만 몇 백년 혹은 몇 천년의 기간이면 상당히 다른 모습의 언어로 바뀐다. 120여년 전 서양 선교사들이 편찬한 한국어 회화책에는 오늘날 국어에서 전혀 쓰지 않거나 쓰면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국어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 ‘백제 말 고구려와 같다’ 기록 남아 ▼

언어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원래 같은 언어라도 사용자들이 접촉하지 않고 수백 수천년이 지나면 서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로 분화한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유럽의 대다수 언어들은 수천년 전 선사시대의 어떤 언어에서 단계적으로 갈라져 나온 언어들로 추정된다.

서울말과 평양말은 50년 동안 완전히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변화해 왔지만 서로 통하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근래 평양에서 온 사람의 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고, 1·4 후퇴 때 남하한 80, 90대 할머니들의 평양말과 사뭇 다른 억양을 느낄 수 있다.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는 700여년간 정립(鼎立)해 있었다. 설혹 세 나라의 말이 원래는 같은 말이었다고 해도, 언어의 일반적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삼국이 위치했던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의 현재 사투리들보다 훨씬 심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나라 말이 서로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상이한 언어였는지, 원활하지는 않지만 대개 이해할 수 있는, 한 언어의 ‘사투리’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세 나라 말의 상황을 추정하기에 충분한 언어자료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삼국시대의 어휘가 나타나지만 우선 우리말(고유어)의 수효가 극히 적고 그것도 정확한 발음을 추정하기 어려운 한자로 씌어 있다.

삼국의 초기인 기원 1∼3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등에 삼국의 언어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 기사가 수록돼 있다. 북쪽의 부여 고구려 동옥저의 말이 같다는 기록은 몇 군데 나타난다. 그리고 양서(梁書)에는 “백제는 선조가 동이(東夷)이고 오늘날 언어와 법속이 고구려와 같다”고 기술돼 있다. 그러나 백제어와 신라어의 상이 여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없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빈약한 언어자료와 단편적인 중국 기록에 의거해 “삼국의 언어가 다른 언어였다”든가 “한 언어의 다른 방언이었다”는 등의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현대어에서도 ‘언어’와 ‘방언’의 구별은 명확한 것이 아니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서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한데 서로 다른 ‘언어’로 취급하는 반면 베이징어와 광둥어는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데도 ‘방언’이라고 부른다. 서울 사람이 경상도 깊은 산골이나 제주도 한라산중 마을에서 평생 외지에 별로 나다니지 않은 할머니를 만나면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국어의 ‘방언적 차이’도 그만큼 클 수 있다.

▼차이 컸겠지만 통일뒤 문제 안돼 ▼

따라서 삼국의 언어가 방언적 차이가 있었다, 언어적 차이가 있었다고 논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삼국의 언어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도 분명하다.

역사적으로나 현재나 ‘민족’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언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언어 혹은 민족적 감정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 유민 통치에 문제가 있었다는 흔적이 없다. 즉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통일신라의 통치권에 쉽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언어적, 즉 민족적으로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송기중 서울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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