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수품 50돌 정의채 신부 "열린 신부님, 깐깐한 신부님"

  • 입력 2003년 4월 18일 18시 26분


78세의 나이에도 정정한 정의채 신부는 “아직 할일이 많으니 90세 이상 살아야 겠다”고 농담을 던지며 크게 웃었다. -김동주기자
78세의 나이에도 정정한 정의채 신부는 “아직 할일이 많으니 90세 이상 살아야 겠다”고 농담을 던지며 크게 웃었다. -김동주기자
“죽지 않으니까 사제 50주년을 맞게 된거지, 이게 뭐 칭찬받을 일이 되기나 하나.”

160㎝가 채 안되는 작은 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베레모를 눌러쓴 정의채(鄭義采·78) 신부를 18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전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500여명의 신부가 모인 가운데 사제수품 5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금경축(金慶祝)으로 불리는 사제수품 50주년은 금혼식만큼 드물다.

그는 1991년 가톨릭대 총장을 끝으로 은퇴한 뒤에도 서강대 석좌교수, 아시아가톨릭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상임고문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에만도 5권의 저서를 펴낼 계획이다. 우선 신자들을 위해 ‘주님의 기도 묵상’을 펴냈다. 발간 한달 만에 3쇄를 찍고 있다.

제자와 후배들의 기념논문집 ‘시간과 영원 사이의 진리’가 나왔고 기념문집 ‘현재와 과거 미래 영원을 넘나드는 삶’ 1, 2, 3권이 나올 예정이다. 기념문집은 정 신부의 50년 사목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좌신부로 사목했던 시기와 가톨릭대 총장으로 사제양성에 힘쓴 일(1권), 생명문화연구소 창립 등 생명사상 보급과 80년대 말 명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았을 때의 회고(2권), 문화활동과 가톨릭철학회장 등의 학문적 업적(3권) 등을 다루고 있다.

“그래도 제일 보람있었던 때는 사제수품 직후 보좌신부를 할 때였어. 그땐 6·25전쟁 직후라 신부들이 부족해 신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본당신부를 맡았는데 일부러 4년간 보좌신부를 자청했지. 돈이다 뭐다 신경쓸 일이 많은 본당신부 대신 아예 보좌신부로 사목만 열심히 하려고 한거지.”

그는 로마 우르바노대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으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기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라’는 제의를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으로 돌아가 일해야 한다’며 뿌리치고 돌아왔다.

가톨릭대 부학장 시절 신학생의 저녁외출 금지와 편지검열 등 규정을 개혁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그때 신학생들 망친다고 말이 많았지. 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밀고 나갔지. 문제는 이게 올바른 길인가에 대한 판단이야.”

주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신부였던 그는 사회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80년대 말 명동성당 신부로 거의 매일 시위대와 함께 할 때는 학생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깐깐한 신부이기도 했다.

“데모를 하느라 성당 일을 못하게 하는 거야. 결혼식 장례식 심지어 미사보기도 쉽지 않았지. 그래서 ‘너희가 성당에 들어온 것은 성당의 신성한 의미 때문인데 그 본래의 것을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 그래서 성당 앞의 계단에서만 데모를 하게 했어.”

명동성당 시절 조성만씨가 투신자살한 현장을 보며 사회의 문화가 자꾸 죽음의 문화로 가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서강대에 생명문화연구소를 설립해 ‘생명의 문화’를 보급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2000년 대만에서 열린 세계가톨릭학회에서도 동서양의 접점을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논리가 호응을 얻었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많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번역을 계속하고 있고 올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세계가톨릭철학학회’ 준비도 해야 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책 등을 잔뜩 넣은 륙색을 메고 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삶과 신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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